2025 KSA 백일장 산문 부문 장려상 수상작 - <등불지기>
과거의 영광(榮光)을 쫓아서
제 1장 : 세상의 전원이 내려간 뒤
세상이 꺼졌다. 암전(暗轉)이다. 바쁘게 돌아가던 회사들도, 자동차들도, 사람들도. 이젠 그런 것들의 오래된 기억이자 과거의 영광의 흔적일 뿐이다. 18년 전 대전쟁 중 터진 전자기 폭탄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전기를 저장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완전한 어둠밖에 없다. 세상에는 장막이 드리웠고,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잔상들과 극소수의 인간들 뿐이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옛 발전소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중추”는 인간들의 마지막 거점으로 작용하였다. 산산조각나는 인간들 간의 협동심의 마지막 산물이었다. 마치 심해에서 자신의 미약한 빛으로 주위를 밝히는 물고기처럼, 인간들은 어둠의 세계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희망의 불씨는 언젠가는 반드시 멎게 되어 있다고.
강윤슬은 달린다.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진 세상 속에서, 윤슬 주위의 반경 1미터는 환하게 밝다. 윤슬과 같은 등불지기들은 기다란 전선을 통해 중추로부터 등불을 위한 전기를 공급받으며, 그 누구도 하지 않을 행동을 한다. 등불지기들은 산산조각난 문명 속에서 중추와 중추를 연결하는 불완전한 인간 사회를 연결하는 인류의 마지막 전선이다.
그 누구도 이것을 하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중추의 거대한 벽을 넘어서는 순간, 이제 등불지기는 혼자다. 도와줄 사람은 사치이고, 목숨줄과도 같은 전선이 끊어지면 코앞도 안보이는 세상이다. 매일 둘이 나가면 하나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세상에서 윤슬은 묵묵히 오늘도 장벽 밖으로 몸을 던진다.
제 2장 : 등불지기의 마지막 기록
암전 후 18년 9월 14일. 강윤슬은 여느 때와 같이 보급 임무를 위해서 중추에서 좀 떨어진 창고에서 재료를 수급하고 있었다. 찬장 좀 높은 곳에 있는 통조림 캔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깜빡.
희미한 노란색을 내뿜던 등불이 갑자기 순간적으로 점멸했다. 순간 세상 돌아가는 것이 멈춘 듯 했다. 분명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윤슬의 속을 뒤집어놓기에는 충분했다. 중추 밖에서의 소등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명제였다. 등불지기 중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며, 이 법칙에서는 윤슬도 예외는 아니었다. 버려진 창고에서 재료를 수급하던 윤슬은 그 즉시 하던 것을 멈추고 중추를 향해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깜빡.
빛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등 뒤로 손 백 개가 본인을 붙드는 것 같은 느낌의 스산한 한기가 느껴진다. 열심히 뛰고 있지만, 이미 윤슬 본인도 알고 있었다. 중추까지는 너무 많이 남았다는 것을. 저 멀리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빛을 밝히고 있을 중추를 가늠하며 윤슬은 마지막 희망을 위해 뛰고, 또 뛰었다.
빛이 점점 꺼져간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길었다. 윤슬에게 어둠의 한기가 느껴지기에는 충분했다. 무언가에 걸렸는지 윤슬의 몸이 맥없이 고꾸라지며 넘어져버렸다. 윤슬의 희망을 나타내는 것처럼, 랜턴은 유리가 산산조각 난 채 자신의 마지막 필라멘트를 희생해 가며 맥없이 바닥에서 구른다. 윤슬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포기하자.
툭. 등불지기라면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랜턴의 마지막 필라멘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해서 전혀 좋을 것이 없는 한기가 윤슬을 엄습한다.
윤슬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윤슬은 깨달았다.
자신의 눈은 이제 쓸모 없음을.
제 3장 : 어둠 속에는 무엇이 도사릴까
빛이 사라진 순간, 세상이 윤슬을 먹잇감으로 삼은 듯 했다. 아까 전의 ‘무언가’가 윤슬의 곁을 지나가며 괴수의 비명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슬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각이 마비된 등불지기는 마치 총을 잃어버린 군인과 동치였다. 일어나려다가 부서진 랜턴의 잔해를 짚어버렸는지 윤슬의 손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다시 주저앉는다. 이제 진짜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때였다. 망막에 맺힌 잔상이라 착각할 정도로 희미한 노란색 불빛이 보인다. 하나의 빛이 아니다. 몇초 간격으로 계속 깜빡이는 수십 개의 불빛이었다. 빛이다. 희망이다. 윤슬은 모든 것을 내팽겨치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형광등을 보면 이끌리는 하루살이처럼, 윤슬은 오직 빛만을 향하여 뛰었다. 버려진 철골에 다리가 긁혀 피가 났지만 이제 윤슬은 그런 것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눈치채지 못했다. 윤슬의 모든 감각은, 다시 한번 활성화된 시각에 잡아먹혀 이제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림잡아 50미터 남았다. 눅눅한 한기가 등 뒤에서 느껴지지만, 조금만 더 가면 탈출할 수 있었다. 몸 속 힘을 전부 긁어모아서 윤슬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30미터 남았다. 윤슬의 머릿속에 대뜸 한 생각이 스쳤다. 저 빛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런 세상에서, 주인 없는 빛은 없다. 다른 등불지기일까, 아니면 중추일까? 어쨌든 빛을 가진 자를 만나면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그 순간, 길을 막던 건물을 지나치고 나서야 비로소 빛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광장의 한복판에 서있는 낡은 신문 가판대에, 위태로울 정도로 많은 빛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낡은 랜턴과 자동차 헤드라이트, 비상용 손전등까지. 각 전등의 원래는 안심되는 윙 소리가 모여 매우 불쾌한 화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곳은 안식처가 아니었다. 빛의 감옥이었다. 그리고 윤슬은 곧 그 수감자를 만나게 될 예정이었다.
제 4장 : 빛의 감옥 속의 하루살이
- 거기 누구야! 누구냐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가판대 아래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족히 30년은 된 듯한 모자를 쓰고 퀭한 눈빛을 한 노인이 서있었다. 그는 빛의 감옥 속에서도 자신의 아이인 마냥 랜턴을 안고 있었다.
노인은 윤슬이 빛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서야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동정 보다는 광적인 확신만이 서려 있었다.
- 쯧, 빛을 잃은 듯 하군. 이리 들어오게. 어둠에 먹히기 전에.
노인이 안내한 가판대 내부는 밖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수많은 전선이 뱀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고, 배터리들은 언제 터질지 모를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그 열기와 광량이 마치, 하나의 작은 태양 속에 들어온 듯 하였다. 가판대 한 구석에는 작은 액자가 하나 있었다. 어느 아버지와 아들의 사진이었다. 상태로 보아하니 대전쟁 전의 유물인 듯 하였다.
노인은 자신의 태양의 구성품들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 이것들이 내 생명줄이라네! 난 이것들만 있으면 어둠 속에 있는 “그놈들”로부터 안전하지.
- 그놈들이요?
- 그래! 자네는 경험해 본적 없나?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들 말일세. 놈들은 빛이 없는 사람들을 끌고가. 하지만 나와 자네는 안전하다네. 이 위대한 빛의 성 속에서는!
노인은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었지만, 눈은 가판대 창문을 넘어 어둠을 계속해서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둠을 피하여 빛의 성채를 쌓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빛이 만든 그림자 속에 갇혀버린 듯 했다.
윤슬은 노인의 비쩍 마른 팔과 손가락을 보았다. 노인은 어둠에게서 생존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죽음을 끊임없이 유예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어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피하다가 오히려 빛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순간, 노인의 모습에 윤슬이 비쳐 보였고, 윤슬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전, 어둠 속에서 빛만을 보고 달린 자신은 이 노인과 무엇이 다른걸까? 어둠이 무섭다고 중추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그 순간, 윤슬은 깨달았다. 자신이, 아니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것들은 어둠 그 자체가 아니었다. 어둠이 가져올 거라고 믿었던 ‘무언가’들이었던 것이다. 빛만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빛이 우리를 더 좁은 곳에 가두고 있었던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 저는…가보겠습니다.
윤슬은 방금 자신이 닫았던 좁은 가판대의 나무 문을 다시 열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말리려고 하는 노인을 뒤로하고, 윤슬은 잠시 고민하다 벽에 있는 손전등 하나를 뜯었다.
- 혹시 모르잖아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을 뒤로 하고, 윤슬은 다시 한번 어둠으로 뛰어들었다. 이상하리만큼 무섭지 않았다.
제 5장. 암순응
5년 전, 한 여자아이와 그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어 약이 절실하였는데, 중추 속의 유일한 약국에서는 그 약이 도난당한 상황이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전염병은 옛날부터 있었기에, 중추 밖의 약국에 방문한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무서웠다. 본인의 엄마가 죽는 것도 무서웠지만, 중추 밖은 모두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이는 이내 결심이 섰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비가 오는 어느날 밤, 아이는 손전등과 전선을 연결하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하지만 작별인사를 하러 간 어머니의 침실에는 어머니의 싸늘한 시체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강한 분이셨다. 사실 이 전염병에 감염이 되고 이정도까지 살아남은 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둠의 앞에서는 굴복하셨다. 한명의 불씨가 꺼지자, 다른 한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본인이 등불지기가 되리라 다짐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강윤슬이었다.
빛의 감옥에서 서서히 멀어지면서, 윤슬은 본인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도 오래되었을, 낡아가는 랜턴이 희미한 노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는 랜턴의 전원 코드를 쳐다봤다.
자신은 빛을 원했다. 그것을 윤슬은 자각하고 있었고, 몸도 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빛의 감옥에 갇히는 것은 싫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둠에 적응해야 했다.
얼핏 자신의 손 속에 있는 빛의 감옥을 쳐다보았다. 5년 전에 한 여자아이가 자신의 익숙하던 새장에서 벗어났던 것 처럼, 이제는 다 큰 등불지기가 자신의 새장에서 벗어날 차례였다.
윤슬은 떨리는 손을 랜턴의 전선에 가져갔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당장 몇시간 전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윤슬은 몸을 떨었다. 자신이 반사적으로 다시 랜턴에 전선을 꼽는 것을 손을 쎄게 감싸쥐며 겨우 막았다. 아까 전 유리에 찔린 손에 저릿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윤슬은 아픈 손을 감싸쥐며 그 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했다. 놀랍게도, 어둠이 전만큼은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느꼈던 스산한 어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괴수의 비명들은 그저 바람에 낡은 철판이 글히는 소리로 들렸다. 평온함 뿐이었다. 자신을 반기지도 배척하지도 않는, 중립적이고 순수한 어둠.
윤슬은 뛰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자신이 갈 길을 걸었다.
세상이 꺼졌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유독 하늘이 밝아 보였다. 드디어 세상에 드리워진 검은 어둠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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