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KSA 백일장 산문 부문 장려상 수상작 -<우리들>: Rewrite

2025 KSA 백일장 산문 부문 장려상 수상작 -<우리들>: Rewrite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장편 [1Q84 BOOK1]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성한 중편 소설. 그 외에도 여러 소설이나 영화에 무의식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바로 아래의 pdf파일은 백일장에 출품한 원본을 그대로 변환한 것이다.

소설 중 2부를 급하게 끝낸 것이 아쉬워 전반적으로 고치고 15장부터는 완전히 새로 썼다. 1부에서는 크게 변한 부분은 없으나 미세한 표현 등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제목을 기존의 제제인 [우리들]로 정했다. 새로 쓴 부분은 문체적인 부분에서 [1Q84] BOOK1&2에서 가장 큰 영감을 얻었다.

쓰다보니 200자 원고지 300매라는 분량이 되어버렸다.

착수일: 2025년 9월 18일 목요일
초판 완성: 2025년 10월 10일 금요일 19시 경
출품일: 2025년 10월 10일 금요일 21시 경

재작성 시작: 2025년 12월 2일 화요일
초판 완성: 2025년 12월 16일 화요일 01시 경
완성: 2025년 12월 20일 토요일

아래는 12월 16일 완성한 초판이다.


 

 

 

 

 

 

I

 

 

1

 

연락을 받고 그녀는 다음날 일을 나가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한 친구가 사망했다는 부고인데 그녀와 비슷했던 친구의 나이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 죽음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믿었다. 실감은 나지 않았어도 이상하게 슬프기는 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울었다. 그녀의 기억은 자신이 운 적이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언급할 정도로 최근의 일은 아니었다) 우는 중에 그 사실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보통의 반응이리라, 그녀는 생각했다.

 

 

2

 

‘언제나 그렇듯 이곳은 완벽한 장소이다.’ 자기 자신에게 계속 이 문장을 말해보아도 전혀 질리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나 사실인 문장은 쉽게 잊어버리기 마련인데, 이 문장만큼은 전혀 아니었다. 역시 세상에 진리만큼 안정적인 대상이 없음을 되새긴다.

 

 

3

 

다음날 예정대로, 아니 어쩌면 갑작스럽게 일을 가지 않고 장례식을 갔다. 그곳에서 한울이의 가족들과 만났다. 그리고 드문드문 아는 그의 친구들과 같이 먹었다. 모든 것이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무엇 하나 다른 점이 없다는 그것, 그게 바로 평소와 다른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아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를 것이지만 한울이는 이렇게 사라져갈 친구가 아니다. 그저 늘어나는 청년 사망자 수 통계에 기여하고서 몇몇의 기억을 빼고 아무데도 서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와 관련된 것이든 아니든, 실존하는 무언가에 깃들어 영원히 존속할 영혼이다. 누군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바로 자신임에 그녀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식장에서 나와 가는 길에서 주변 모든 세상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친구의 장례식 이후에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면 잘 넘겨 버릴 법한 데도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무시하지 않기로 평소처럼 결정했다. 최한울의 장례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여전히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세상이어도. 진정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그녀의 직감을 전혀 바꾸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의 직감에 따라 행동한다는 원칙을 가진 그녀의 행동도 그러했다. ‘진짜야.’라고 그녀는 속으로 읊조렸다.

그녀는 태양의 빛이 더 뜨거워진 변화를 눈치챘다. 하루의 흐름으로 그 대상이 달라질 수 없음은 직감도 아닌 상식이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세계는 그녀가 이전에 경험한 것과는 확실히 다르고 또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한울이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원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야 할 의무를 짊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무언가가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여느 때처럼 존재하는 사람들을 알 수도 없이 바꿔버릴 거대한 그것이 나타나기를.

세상이 달라져 버렸다는 증거는 이것뿐이 아니다. 그렇게 확신한다. 장례식장 안에서의 일들을 생각해보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면 이것이 한울이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분명 한울이는 나에게 이따금씩 자신이 죽어도 하나도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 사람은 한울이의 죽음을 알고도 일을 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은 울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반응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어떤 정보를 받아드린 감정이겠지. 마치 신문 구석에서 ‘바이러스 5차 변이, 남아프리카 동북부를 중심으로 창궐’이라는 헤드라인을 보고 덮듯이. 둘 다 사람이 죽는 일이니 그럴 것이다. 라는 생각이 지나가자 그녀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자신의 결정을 직감에 맡겼다.

 

‘그래, 그 존재가 있어. 그래서 이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녀는 자신에게 말한 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고심해 보았다. 그러나 그 존재를 실제로 마주하지 않고는 아무 실마리도 찾을 수 없을 듯했다. 이건 직감도 아닌 불가능함이었다. 햇빛만이 이 변화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은 한울이라는 존재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 통제하에 놓아야 한다. 이 끝없는 변화의 양상을 손아귀에 잡아두지 않으면 무언가를 유실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골목에 한 남자가 누운 듯 앉아있었다. 심하게 말라 피부와 뼈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못하게 했다. 피부는 뾰족하게 돌출된 작은 손뼈와 팔꿈치뼈에 걸린 채로 현수막처럼 팔에 널렸다. 직선으로 뻗은 현수막의 윗부분 밧줄은 기묘한 탄력을 유지했다. 다리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 몸도 그렇겠지. 입을 내밀어 담배를 열심히 물고 있었다. 나는 헛구역질을 애써 참으며 길을 나섰다.

 

한밤을 더 보내고 일하러 갔다. 4분 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도착하여 평소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조금 기뻤다. 버스 안은 평소처럼 비어 있고 잘못 배합된 방향제와 세제의 냄새가 났다. 그래도 꽤 빠르게 익숙해지는 편이었다. 한 번 큰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고 다시 들이쉬었다. 간헐적인 흔들림 사이사이 한울이를 생각했다. 그는 2개월 하고도 10일 전, 헤어지고 나서 만난 적이 없었다. 그 헤어짐은 이전과 완벽하게 똑같았고 이후 연락이 없다는 것까지 변화가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실마리는 그때의 한울이에게 없는 듯했다.

출근한 학원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아침이라 어제 이전의 낮과 같은, 뜨거워진 햇빛을 제외하면. 카운터 직원의 인사는 조금은 작게 받아친다. 그리고 조금 걸어가자 보이는 내 수업의 학생에게는 언제나와 같이 정중하게 인사한다. 첫 수업에서 한 남학생은 어딘가가 불편해 보이더니 내 풀이에 대하여 질문한다. 삼차함수의 그래프에 접선을 여러 번 그려야 하는 문제였는데 중간에 분필이 부러졌다. 그래서 그 이후 그리는 접선들은 이전의 것보다 더 굵어졌다. 그러나 더 반듯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시험을 보는 시간이다. 그동안 오후 수업과 그다음 수업을 준비하면 밥을 먹을 시간이 된다. 오늘은 특별히 학원 밖에서 먹어볼까. 라고 이미 이를 가기 전부터 결심한 듯했다. 한울이는 나에게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고는 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서 잃는 것이 얻는 것보다 크니 이를 완전히 그만두고 싶다고, 원하는 만남에서 오는 행복은 한순간이지만 원치 않는 만남에서 오는 고통은 길다고. 그러한 도망이 단순히 물리적인 대면으로부터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과 자신을 연결하는 대상들에 대해 한울이는 기본적으로 마땅치 않아 했다. 만약 한울이가 내 수업의 학생이었다면, 그 남학생이었다면, 질문을 할 때 무엇이 불편했을까. 수업을 마치고 보아야만 하는 시험은 어땠을까. 마지막 날에 이 말을 했었던가.

 

그녀는 자신에게 수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보았다. 수학 강사를 직업으로 삼으면서도 이러한 생각이 새삼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이 지나갈 때까지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때 한울이를 처음 만났지. 라고 깨달으며 다시 자신의 기억 속으로 잠수하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아마 점심시간 안에 끝날 탐사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점심시간 동안에는 이 헤엄에 집중하기로 했다.

 

 

4

 

아침에 일어나자 다시 한번 언제나와 같음을 느낀다. 창밖에는 잔디밭 마당과 울타리, 작은 나무와 햇빛이 보였다. 햇볕이 저번보다 조금 더 약해진 것 같기는 하나 이것이 피할 수 없는 변화들 중 마지막일 것이라 말해본다.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마신 후 밖으로 나오니 상쾌한 논의 공기가 나를 맞아준다. 출렁이는 벼들 사이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논을 하늘에 떠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래도 이 모습을 여기서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자.

밖으로 나와 마당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과일 가게가 보인다. 과일은 어제 사 왔는데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밤 혼자 다 먹어 치워 버린 기억이 났다. 들어서자 보이는 주인 어르신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정중하게 인사하고 부모님 심부름을 온 듯한 아이에게는 살갑게 인사해 준다. 아이는 빨간 장바구니에 과일을 꾹꾹 담아 인사를 받아주고 집으로 행했다. 다섯 가족이니 저 정도는 필요하겠구나, 생각한다. 아이 오른쪽에서 신나게 흔들거리는 빨간 장바구니의 잔상이 눈에 남았다. 장바구니를 하나 장만해 볼까. 라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는 산 과일을 종이봉투에 담는다. 과일의 흔들림이 종이봉투를 툭툭 치면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종이로 된 벼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가.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바나나 하나와 사과 두 개. 집 의자에 앉아 바나나의 껍질을 두 번 벗겼을 때

‘언제나 그렇듯 이곳은 완벽한 장소이다.’ 자기 자신에게 계속 이 문장을 말해보아도 전혀 질리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5

 

오후 수업은 그저 그렇게 마쳤다. 분필이 의도치 않게 부러지는 일도, 어떤 학생이 불편해하다가 질문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오후 수업이 끝나면 저녁을 먹기 전에 오후 수업을 들었던 학생과의 상담이 있다. 꽤 오랜만에 하는 상담이라 긴장해 갑자기 딴생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긴장했을 때의 오랜 습관이다. 다른 학생들이 방을 나서자 그 학생은 필통과 교재를 정리해 책상 위에 쌓아두고 나에게 왔다. 바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책상에 의자를 끌고 와 마주 보고 앉았다. 이 여학생은 수학을 잘한다. 13명이 되는 반에서 시험 점수로 항상 1, 2등을 유지한다. 그리고 2등이 된 날에는 어딘가 불편하고 애써 이를 들어내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아마 자신은 이 가림이 학생들에게는 썩 잘 통한다고 확신하고 있으리라.

그녀는 시험에서 한 두 문제를 제외하면 모두 계산 실수로 틀렸다. 그리고 그 한 두 문제까지 맞추는 날, 그녀는 29점이나 28점을 받았다. 결국 계산 실수를 해서든, 그냥 풀지 못해서든, 30점을 받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래도 1등을 일상적으로 받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나는 그녀에게 더 어려운 수업을 하는 선생님의 반으로 옮기라 권유할 것이다.

“일단은... 하은이가 평균 점수가 25.7점 이렇게 나와요. 그리고 이번 달, 9월 달만 보면은 5번 시험 동안 27.2, 이렇게 조금 높거든.”

“네”

“사실 이 시험이 20에서 22 사이, 그렇게 맞추어서 점수가 나오도록 낸다고 계획하고 있거든요. 뭐, 실제로 반 전체 평균도 그 정도 나오고. 그런데 이 시험이 하은이한테는 조금 쉬운 거 같다, 그죠? 어때?”

“조금 그렇긴 한데... 그냥 쉬운 문제들 빠르게 풀고 뒤쪽에 좀 오래 걸리는 거 집중해서 풀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렇지. 선생님이 시험 질문 풀이해 줄 때도 29번, 30번 이런 거 아니면은 계속 듣고 있는 것도 그렇고 해서... 아마 반을 올리는 게 하은이한테 좋을 거 같아. 수업에서 말한 거처럼 하은이는 굉장히 뛰어난 학생이니까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곳을 가야 한다 이거지.”

하은이는 수긍하는 듯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원래 고려하고 있던 경우의 수 중 하나를 들은 것뿐이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척을 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나를 속이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조병훈 선생님 수업 중에서 여기보다 한 학기 빠른 게 있거든. 거기도 있고 또 한 학기 반 빠른 게 또 있고. 선생님은 아마 조병훈 선생님 게 더 좋은 거 같은데, 어때?”

 

하은이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녀는 학생에게 집에 가서 부모님과 상의해 보는 게 어떻겠냐 물었다. 그렇게 상담은 끝이 났다. 학생은 뒤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 가 정리해 좋은 필통과 교재를 한번에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하은이가 교실을 완전히 나가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척을 했다. 학생을 속이고 싶었나.

 

한울이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그 직전에 만난 것과 1달이 넘게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랜만이라 상각하고 반갑게 말했다. 그리고 만난 뒤로 한 일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전에 만난 날을 생각하였다.

“어, 왔구나. 여기.”

그리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가 내렸다. 비어 있던 버스에는 나와 한울이와 어떤 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우리가 버스를 타기 전부터 있었고 내가 내릴 때 있었다. 한울이가 내릴 때 있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같이 내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더라도 내리는 동안 무언가를 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한울이를 한 달간 기다리게 했다. 그 사람이 장례식의 그 사람이던가.

 

 

6

 

저들을 빨리 떼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달려들었다. 그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이들을 말릴 또 다른 사람이 이 길목을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의 행동이다. 빨간 옷을 입은 한 아이는 상대가 자신의 장난감을 빼앗아 망가뜨렸다고 했다. 다른 아이는 놀이 중 빨간 옷 아이가 반칙을 해 압수한 것뿐이라 했다. 그리고 이전에 반칙하는 사람은 자신의 장난감을 내주기로 합의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 빨간 옷 아이가 처음에는 그런 합의가 없었다고 발뺌하다가 도중에 말을 바꾸어 신뢰할 수도 없다고 소리쳤다.

아마 반칙을 정의하고 반칙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데에 문제가 발생한 듯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설명할 사람이 두 아이밖에 없어 모두 객관적이라 할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아저씨’에게 데려가면 된다. 일상적인 문제이고 게다가 어린아이들의 것이니 4급 센터로 간다. 운 좋게도 바로 눈앞에 4급 센터가 보였다. 마이크가 보이고 빨간 옷 아이가 다가가 말을 한다. 1분이 끝나자 다른 아이가 설명을 한다. 이번에는 더 빨리 끝났다. 깜빡이는 초록색 불빛이 소리를 내더니 화면에 메시지를 띄었다.

그러자 빨간 옷의 아이가 사과를 받고 놀이 규칙의 기준을 제시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와 합의를 반복해 가며 길을 나섰다. 4급이면 아이들끼리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자 다시 한번 언제나와 같음을 느낀다.

 

 

7

 

그녀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짐을 침대의 벽면에 대충 세워두고 좋은 의자에 앉는다. 넓은 책상 위는 어질러져 있다고도, 정돈돼 있다고도 할 수 없었다. 평소에 책상을 깔끔하게 쓰지 않던 그녀가 어제 청소를 했기 때문이다. 책상에 빈 공간이 보였다. 그녀가 원래 노트북을 놓는 자리이다. 고개를 살짝 올리니 책들이 보였다. 소설책이 대부분이고 그중 많은 것은 일본 작가의 작품들이다. 다시 고개를 내리니 쌓여있는 종이들이 보였다. 수학 문제의 풀이가 적힌 연습장이거나 가끔씩 끄적이던 단편 소설들이리라.

그녀는 자신이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 내는 데에 큰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소설들이 뻔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전부 자신이 어딘가에서 읽은 소설의 내용을 조금 바꿔 적어놓은 것들이다. 주제, 인물과 배경의 설정, 사건의 양상 등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느낌이 전혀 없었다. 참신한 무언가를 잡았다는 영감이 들다가도 막상 쓰다 보면 개성이 사라지고 그저 그런 이야기가 되는 기분이었다. 라고 그녀는 글을 쓰는 자신에게 말하고는 했다.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수학을 잘하는 여학생이었다. 그녀를 이전부터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수학 올림피아드 경험을 묻고는 했다. 그녀는 경험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선생님들은 순수한 감탄의 감정을, 학생들은 질투 섞인 경의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리고 질문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녀 입장에선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나의 절차같이 느껴졌다. 착각해 줘 고맙다는 듯한 눈웃음만 기계적으로 내보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모르는 세에 잔뜩 거만해진 건 아닐까 하고 불안감이 들었다. 그녀는 이전부터 거만한 사람들을 보면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저러다 큰 폐 보겠지’라 생각하고 이 기분을 애써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서든 거만하다는 것은 그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수학교육학을 전공으로 학교에 입학한 뒤 그녀는 보통에서 조금 높은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 자신이 수학에서 보통이라는 것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한 번은 점수를 보았을 때 예상보다 너무 낮아 놀랐다. 몸 내부의 장기들이 단번에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어떤 감정으로 저장되지 못한 생소함과 ‘왜’라는 이해되지 못한 질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자 그저 그런 일이 되었다.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는 믿는다. 여러 거만한 사람들처럼 경험이 부족했다.

 

그녀가 처음 글을 썼을 때였다. 자신의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면 꽤 의미 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리고 3달 반 만에 작성한 중편 소설을 인터넷 어딘가에 개시하였다. 그 소설을 보고 한울이가 그녀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소설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읽는 데에 시간을 할애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갈수록 작성과 동시에 자신감을 점점 잃어갔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한 남자는 숲을 거닌다. 그러다 그 숲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여러 부족들과 상호작용 한다. 각 부족들은 야생성 말고도 대표되는 인간의 본성을 하나씩 품고 있다. 한쪽은 극히 탐욕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욕에 행동이 지배당하기도 한다. 선한 성격의 부족을 배치할지 말지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 남자의 등장으로 부족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전쟁한다. 남자는 전쟁에서 특정 상징이 되어 여러 부족을 강제로 옮겨 다니며 비이성적인 의식의 대상이 된다. 남자는 그 상징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그들이 남자의 사회적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남자와 그들은 이미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뒤였다. 그녀가 이 소설에 대하여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소설이 담는 두 가지 인간의 모습이 시작부터 좁혀질 수 없는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이질감에 모두가, 차이를 극복하겠다는 희망이, 압도되기를 바랐다.

 

다시 한번, 그녀는 세상의 변화에 대하여 느끼려 시도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시공간은 아무런 차이점도 발견할 수 없는 일상적인 하루의 끝이었다. 그러나 긴장할 때면 오던 손목 안쪽 부분의 은근한 찌릿함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 떨림은 신경을 타고 팔꿈치까지 이동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드리는 듯했다. 내적인 변화는 분명 새로운 자극의 등장을 의미했다.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특이하게 직감은 진짜 세상이 달라졌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이 그녀가 감을 잡지 못하게 막았다. 그녀는 미래에 닥쳐올 일들을 어떠한 잣대로도 가늠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막막함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세상의 변화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 자신의 변화가 마음에 걸렸다. 거친 흙바닥을 횡단하는 사고의 수레가 툭 하고 내려앉은 듯했다. 수레 끄는 사람은 뒤를 돌아 하강한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봤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의 땅을 이리 울퉁불퉁하게 변형했는지 생각했다. 힘주어 빠르게 달리는 자신의 수레까지 멈춰버릴 정도의 굴곡.

 

아무리 보아도 변하는 그녀 자신에게 있었다. 이 세상이 송두리째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보다는 더 알맞은 가설이었다. 세상은 이전과 같은 형태로 있고 그녀만이 갑자기 이동한 것이다. 어떤 계기로 두 우주 사이의 공간을 넘어왔다. 그녀는 원래 자신이 존재하던 세계와 이전과 다른 세계를 구분해야 한다고 느꼈다. 두 우주가 존재하는 거대한 무대에서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번의 이동이 사라질 수 없는 어색함을 남겼다.

‘지금 여기는 내가 운 세계.’ 그녀는 자신이 울었던 기억을 더듬어가며 속으로 말했다. ‘그 계기는 한울이의 죽음.’

 

 

8

 

그녀는 아침부터 교회를 향해 뛰고 있었다. 어젯밤 다른 날들과 다르게 특별히 늦게 잔 것이 그 원인이라 생각했다. 항상 지나는 길과 그 옆의 나무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녀를 걱정해주거나 응원해 주지 않았다. 반대로 그녀를 질책하거나 한심하게 보지 않았다.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이들이 처음에 가지고서는 변하지 않은 특성들이 지금 세상의 것과 같음에 기뻐했다. 그리고 유지되는 특성들의 유지, 그 자체에 안도했다. 물론 이 것들은 모두 여유가 생기고 난 조금 뒤의 미래에 생각한 것들이다.

 

교회에서는 단체의 장이자 성인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는 파란 정장을 입고 단상 위에 올라와 말을 한다. 단체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있을 때는 거의 다 그 구도였다. 그의 연설은 현실과 꿈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믿을 만한 농산물 중간 판매 업자가 되어주었다는 이야기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에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함께했다. 단체 사람들은 그의 성스러움에 제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갑자기 집에 과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제 저녘에 세운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기 전 과일을 사겠다는 계획이 무산된 탓이었다. 그리고 연설 중 딴생각한 자신에 놀랐다. 그날 밤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자신의 친구가 이상하다 생각했다.

연설이 끝나고 밖으로 나서자 한 길목 옆쪽에서 두 아이가 싸우고 있는 것을 봤다. 아마 오늘 교회에 오지 않은 듯했다. 뭐, 저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주제는 아니다.

저들을 빨리 떼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달려들었다.

 

 

 

9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그녀가 친구들과의 전화 중 한 번씩은 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그녀가 괜찮은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 특별한 한울이가 있었던 다른 세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대부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 것들이 태초부터 달랐다면, 언젠가 다시 거대한 무언가로 변모할 것이라 믿었다. 그 거대한 무언가가 닥쳐올 때 자신만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이 그녀는 걱정스러웠다. 아무도 생소함에 휘둘리는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책장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둔 책, [1Q84]를 보았다. 3권으로 구성된 시리즈에서 아직 가장 처음 것만 읽은 상태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해 어릴 적 그녀의 방 책장에 하루키의 모든 책을 보관하곤 했다. 그리고 그중 [1Q84]가 가장 재미있다고 거듭 추천했다.

그 속의 주인공은 자신이 있는 세계가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경찰의 총기 모델이 달라졌다는 것을 계기로 변화를 알아차리고 택시에서 틀려있던 한 음악이 그 원인임을 추론한다.

주인공이 옮겨 간 세상에서는 달이 두 개다. 책의 뒤쪽 덧표지에는 ‘당신의 하늘에는 몇 개의 달이 떠 있습니까?’라 쓰여있었다.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달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의 자리에서는 달이 보이지 않았다. 몸을 옮겨 머리를 창문에 붙이자 달의 일부분이 창틀에 가려서 보였다. 달이 한 개인지 두 개인지는 판별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달이 두 개가 되는 것은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니라, 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 학원으로 출근했다. 버스에서 한 남자가 그녀가 평소 앉는 자리 바로 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정장 셔츠를 입고 소매 부분을 팔꿈치 절반까지 걷어 놓았다. 몸통이 두툼하지 않아 다른 신체들까지 말라 보였다. 그는 자신이 출근하는 평범한 한 직장인처럼 보이기 위해 신중하게 움직임 하나하나를 조절하고 있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별로 의식하지 못했겠지,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한 정거장 빠르게 내린 후 걸어간다. 덕분에 일자리에 3분 정도 늦을 것 같다는 생각에도 그 남자를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저번 버스 속의 그 사람인가? 계속 버스를 통해 접근해 나가는 이유는? 아마 가장 일상적인 장소를 통해 주위 사람과 대상이 느끼는 위화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이겠지. 그녀는 문득 자신이 너무 성급했을 수 있다고 느꼈다. 그 당시에는 밖이 너무 어두워 버스 안에서의 피아 식별도 정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한울이와 함께 있었다.

학원에서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아무래도 수학을 잘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너무 정제된 능력을 요구하는 문제라 생각했다.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 수학을 싫어하는 친구들에게 공감하지 못했다. 그들의 말에서 의미를 찾고 언급된 원인의 정당성을 분석해 합당하다는 판단을 내릴 뿐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된 자신만의 원인을 만들려 노력해 보았다. 아마 목적을 잃어 그러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배울 이유도 없는 어려운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불합리함을 느꼈을 수 있다. 그 이유라 할만한 시험도 진짜 능력이 아닌 얼마나 정규화 된 틀에 사고를 끼워 맞추었는지를 평가한다는 생각에 질려 버렸을 수 있다. 결국 수학을 평생 공부할 사람이 아니라면 이에 대해 노력하고 즐겨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수학을 공부하는 목적 또한 너무나도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걸 발견하게 되는 물건들처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수학의 목적이 없는 걸 알아챌 것 같았다.

물론 이런 식의 고민을 하기도 전 걱정했던 것처럼 평생을 수학에 바치는 사람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학에서의 목적을 잃지는 않았다. 수학 강사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고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강사가 그녀임에 만족하게 한다고 믿었다. 그녀가 여전히 수학을 평균보다 훨씬 더 즐겼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수학은 직업과 업무이기도 하면서 안락한 쉼터이기도 했다. 다음 수업에서 소개할 어려운 문제들의 풀이를 적어낼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면 온전히 수학과 논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런 변화하는 외부 요소들도 그 견고한 집중력을 깰 수 없다고 느꼈다. 학생들이 이해하고 기억하기 쉬운 형태로 변형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이미 등장해 익숙해져 있는 개념을 사용하는 게 좋다. 그럼 학생들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과거의 기억에 놀라고 이 놀람이라는 감정은 그들의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몇 주, 몇 달이 지나 친구들에게 ‘이 문제 엄청 신기한 풀이 있는데’하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러한 변환에는 수식을 직감으로 느끼는 능력과 숨겨진 의미로 보는 통찰력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녀가 이미 타고났다고 할 수 있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퇴근할 때 그녀는 버스에서 아침의 그 남자를 다시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루 동안 여러 옷을 입어야 하는 직업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옷 속이 같은 사람인 건 분명했다. 풍기는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원래 내리는 곳보다 한 정거장 뒤에서 내렸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기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이곳에서는 시작부터 당연한 것일 수 있었다. 저 사람이 패션 디자이너여서 자신이 만든 옷의 프로토타입을 입고 일상적인 생활을 편히 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중일 수 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계에서는 현재의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이 가설이 만약 사실이라면 아직, 어쩌면 영원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가 충분하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달라졌고 그 변화가 확인할 수도 없을 만큼 당연한 현상에 대한 것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더 한 정거장씩 다르게 내리기로 결심한다.

 

다음날 그녀의 수업에 하은이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마저도 어떠한 종류의 변화로 받아들였다. 하은이가 아무런 사전 고지 없이 학원을 나오지 않는 것은 웬만큼 큰 일이 아니면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 사건이다. 갑자기 학원에 가기 싫어졌다는 이유를 내세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큰일이 외부에 알릴 수 없을 만큼 급하게 진행되기란 꽤 어렵다. 생각할 거리 없이 ‘일이 있어서’라 보내는 통보식 명분도 전달받지 못한 상황은 처음이었다. 반의 다른 학생들도 그녀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유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더 그랬다.

그녀가 가장 큰 불안을 느낀 것은 바로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만약 지금의 세계에서는 하은이가 학원을 자주 빠졌다면 원래부터 그런 하은이에 익숙해져 있는 학생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 달라진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평소 하은이의 행실에 대해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한 번도 빠진 적 없잖아요. 선생님이 그걸 모르면 어떡해요.’라며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학생, 그것도 가장 잘하는 한 명의 변화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장 유추할 수 없었다. 그냥 물 한 모금 마시고 수업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자신이 물통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껍고 깊은 종이컵 두 개를 포개 3시간 동안 물을 충분히, 그리고 안정적으로 담아둘 수 있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책상 위 빈 공간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글을 썼다. 당장 쓰다 만 글은 없었다. 옆에 놓인 소설이 인쇄된 종이가 꽤 빳빳하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아직 하나를 완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또 다른 하나를 쓰고 싶었다. 이야기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한 사람의 이야기로 한다. 그 사람은 친한 사람 중 하나가 실종되는 일을 겪는다. 언제나와 같은 루틴을 지키는 친구가 갑자기 사라져 이상함은 느끼긴 해도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 친구는 사라져간다. 사람들과 단체들의 기억 속에 남지 않으면 한 명이 기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결국 잊을 테니.

 

 

10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 많은 걸 어떻게 사람이 다 해.”

“그니까 다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라 가끔씩, 뭐 4급은 이미 거의 다 그거 된 거 같고, 3급도 가끔 사람이 하던데. 봐봐, 여기가 그 정도로 무언가를 막 운영할 수 있는 그 규모가 아니라니까. 농장들이 다 엄청 큰 것들은 아니고, 사람이 뭐 엄청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 센터는 싹 다 널려있잖아.”

“그건 당연히 그래야 하니까 그러지.”

“그게 아니라...”

“그리고, 어? 우리 논들이 아저씨 같은 거 운영할 정도도 안 된다고? 그럼 차라리 사람 쓰는 게 더 그렇겠다.”

“그게 아니라, 뭐, 돈 자체가 부족하지는 않을 수 있겠네. 그런데 사람을 쓴다고 돈을 더 써야 되는 건 또 아니야. 봐봐, 아저씨로 일한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명예직이야?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러니까 사람들 끌어다가 센터에 앉히는 거지.”

“아 그런가.”

“그러니까... 그런 거 느껴본 적 없어? 최근에 갑자기 아저씨들이 다 사람처럼 말하는 거. 뭐랄까 예전처럼 사람이 판단하는 느낌?”

“아저씬데 그런 게 어딨어. 몰라, 그냥 다 똑같이 하던데. 아무 데서나.”

“사람이 그걸 한다고 하면 할 때마다, 그러니까 엄청 세밀한 것에도 다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거 아니야. 윈래 아저씨는 그런 거 없고.

어... 그런데 그게 어떻게 달라진 거지? 방향 말이야. 플러슨지 마이너슨지.”

 

그녀는 그가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 치고 특이한 말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대로면 항상 한 명에게 적당하게 유지되는 양의 과일이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과일에 관한 걱정은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과일을 먹는 속도가 줄어든 이후에 그랬다. 최근에 대화를 길게 할만한 일이 없어서 그런지 눕고 나서는 빠르게 잠들었다.

그녀는 아침부터 교회를 향해 뛰고 있었다.

 

 

11

 

다음날은 오후 수업만 있는 날이었기에 오전 동안 쉴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바쁜 기간에는 이런 오전도 쉬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날 오후에도 하은이가 오지 않았다. 학생들의 놀라움이 이번에는 오래 가지 못했다. 아마 둘째 날이 되니까 진짜로 그럴만한 일이 있었다고 믿는 듯했다. 오래 못 올 일은 조금 못 올 일보다 좀 더 신빙성을 얻었다.

시험을 보는 동안 한 학생이 개인적으로 질문을 했다. 시험지를 보여주며 문제에 제시된 조건을 만족시키는 경우는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전 수업 시간 연습 문제로 풀었던 조건에서 숫자 몇 개가 달라진 것이 그 원인이라 말했다. 물론 오류는 문제가 아닌 학생이 고려한 경우들에 있었다. 그 시험지 풀이 공간 중앙에는 삼차함수의 그래프가 빼곡한 접선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중간에 샤프심이 부러졌는지 접선들이 더 굵어져 있었다. 그리고 또렷했다. 그러나 이를 의도했을 리는 없다.

결국 문제에는 오류가 없으니 다시 생각해 답을 내어 보라는 답변밖에 할 수 없다 말했다.

 

수업이 끝나고 버스를 탄 후 한 정거장 빠르게 내려 이어서 걸어갔다. 오후 수업 치고는 빨리 끝난 편 인에도 버스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 남자에 관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육교 밑에서 앞서가는 버스의 소리가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바로 전 사거리부터 한 트럭이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리가 스포츠카 몇 대의 엔진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트럭이 가드레일에 긁히며 내는, 공기를 찢는 듯한 그 굉음을 듣고 나서 깨달았다. 그 순간 트럭의 앞부분에서 핏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붉은빛의 살점과 분홍빛의 장기 조각이 으깨진 채로 사방에 분사되었다. 펼쳐진 진액의 장벽은 트럭의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못했다. 음료수를 바닥에 쏟아버리는 소리가 났다. 질척한, 토마토 주스 같은 것을 말이다.

몸의 흔적은 현장에 골고루 퍼졌다. 마치 사람의 가죽과 내부를 뒤바꿔 놓고 강하게 내리쳐 털어낸 자리 같았다. 그녀의 뒤통수, 등과 다리 뒷부분은 혈흔으로 벌겋게 젖어 비린 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자신의 시간만을 잠시 멈춰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주변과 자신의 모습을 강제로 보게 되었다. 트럭 운전사도 급발진에서의 충격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앞 유리를 덮은 정체불명의 끈적한 액체를 목격했다. 조그마한 덩어리들이 느리게 미끄러지며 자신의 일부를 유리창에 묻히고 있었다.

 

그날 저녁, 육교 아래는 피와 잇따른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녀와 트럭 운전사, 주위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 같은 차도로 달리던 자동차의 운전자들을 모두 저마다의 정도로 놀라게 했다. 그녀는 본능적인 역겨움에 약하게 토를 하고 최대한 빠르게 정신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리고는 따뜻해졌다 다시 식어버린 자신의 왼쪽 뺨에 손을 얹었다. 아마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한 존재가 상실되는데 걸리는 시간과 그 결과를.

잔해의 주인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마 육교에서 뛰어내렸을 것이다. 차가 없었다면 죽지도 않았을 높이다. 그러나 우연으로 인해 그 사람의 몸은 땅을 밟지도 못하고 산산이 분해되어 터져버렸다. 어떤 우연이 있든 자신이 죽을 걸 기대하고 뛰어내렸을 사람이다. 그곳에는 찢긴 옷 조각에 붙은 명찰이 있었다. 초록색 직사각형에 ‘이하은’이라고 노란 자수가 박혀 있었다. ‘이’, 그리고 ‘ㅎ’과 ‘ㅏ’의 아랫부분이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두 손가락으로 누르면 물기가 빠져나와 다시 황금빛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방금 일어난 현상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제공받지 못했다. 하은이가 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은이가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곳에 존재하는 자료에서 그녀는 여전히 수학을 잘하는 여학생이었다. 3일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녀는 투신이 자연스러운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이는 어디서든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어찌 됐건 이상한 일에 달라진 세계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세계가 진짜로 달라졌는지도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슨 변화가 있어야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녀는 상상해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생긴 변화는 생긴 변화이다. 이 불가항력적 과정에서 그녀의 상상은 어떠한 역할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가 한 번 잃었던 한울이를 떠올렸다. 그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반은 혼잣말로 말했다.

“나? 나는 맞아. 그냥 맞는 일이겠거니 하고 하는 거야. 지금까지는 많이 틀렸지. 그런데 앞으로는 다 맞아.”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조금 벌린 후 코로 웃는 소리를 옅게 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12

 

덕분에 간단한 농사가 잘 끝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농사에 유능한 사람들이 널린 단체라니,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제는 감자 농사에서 벼농사로 조금씩 이동해도 될 때 같았다.

넓은 논을 바라보고 있자면 황금빛을 쏟아낸 노을이 남기고 간 바닥을 발 아래에 둔 느낌이었다. 그 벼들을 흔들어대는 바람은 태양의 섬광을 향연하는 광선의 출렁임으로 오해한 눈에서의 작용을 세상 밖으로 꺼내놓은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긴장할 때 이따금씩 찾아오던 손목 안쪽 부분의 은근한 찌릿함과 동시에 안정될 때 찾아오던 특정한 공기의 출입을 느꼈다. 그리고 그 찌릿함은 긴장이 아니라 전율을 의미한다고 강하게 믿었다.

좋은 자연환경 덕분인지, 인적 환경 덕분인지 이곳의 과일은 품질이 아주 좋았다. 좋은 과일을 함께 재배하여 판매하니 아저씨 같은 걸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싸고 훌륭하고 안전한 과일을 누가 사지 않고 배기겠는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과일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에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부터 팔까지 마른 체형이었다. 근육이 많다기보단 이를 가릴 살점이 부족해 팔다리의 자잘한 굴곡이 두드러졌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더니 빠르게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가 놀란 듯 그를 쳐다보면서 팔을 빼내자 조금 짜증이 섞인 채 더 강하게 팔을 잡아끌었다. 이번엔 그녀가 힘을 주어 저항해도 팔이 빠지지 않자 오히려 남자가 손을 강하게 내리며 팔을 쳐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조곤조곤 욕설을 내뱄고는 팔을 올려 위협했다. “야, 으휴. 쯧, 에이씨”라 말하며 올리지 않은 팔을 이용해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짧은 외마디 비명 같은 신음을 작게 내뱄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하는 그 소리는 그녀의 손바닥이 흙밭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보다 작았다. 종이 봉투 안에서 사과 두 개가 굴러 나왔다.

길을 가던 다른 남자가 천천히 뛰어오더니 마른 남자를 때어놓았다. 이럴 땐 아저씨에게 데려가야 한다고 다가온 남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양쪽에 두고 2급 센터를 향해 이동했다. 마른 남자는 상체를 조금씩 흔들며 나아갔고 그녀는 바닥을 보고 있었다. 아저씨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밖에서 시끄럽게 떠들다 문을 열고는 했다. 그러나 건물 내부로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마른 남자를 더 이상 단체에 남겨 둘 수 없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는 농사를 잘했다. 어쩌면 도움을 주었던 할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인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 긴 기간 동안은 별 변화가 없었다. 그 남자와 더 친해졌을 뿐이다. 그들이 식사를 하던 중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아저씨 관련 일을 제안받았다고 말했다.

일을 소개한 그 사람은 자신을 파란 정장을 입은 남자의 부하 직원이라 소개했다.

“그런데 저한테는 무슨 일로...”

부하 직원은 자신을 포함한 다른 직원들이 단체를 위해 다양한 일을 발로 뛰며 실행해 나간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중 많은 것이 사람을 모으는 등 사람과 관련된 것이라 말했다. 지금도 그 일의 일환으로 그를 아저씨에 관한 일을 하는 자리에 배치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말했다.

“아유, 저는 그런 일 제안이 들어온 거면 감사하죠.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한다는 건가요? 저한테 이런 제의가 들어온 이유가 있나요?”

직원은 이 자리가 간단한 알림이나 관심도 확인을 위해 작게 마련한 것이라 했다. 정확한 내용은 가능한 시간에 센터로 찾아오면 이야기할 것이라 말하며 명함을 건냈다. 명함 속의 장소는 1급 B 센터 6층 2호실이다. 현관문이 닫히며 간단한 알림과 관심도 확인이 끝났다. 그는 조금의 의아함과 함께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식사 이후 그는 그녀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주 바쁜 일이 무더기로 생겨 강제로 이에만 집중해야 하는 사람이 된 듯했다. 그러나 그의 관리 일은 그 정도로 바쁘지 않았다. 일 자체에 할애해야 하는 시간은 그 외의 활동을 하기에 충분히 여유 있었다. 그녀는 그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러나 이 단체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죽음 말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어딘가로 납치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했다. 그랬다면 납치범들은 그의 장기를 꺼내 팔고 남은 껍데기를 산 같은 곳에 묻어 두었을 것이다. 이때도 명백히 죽은 상태인 것이다.

이제는 그의 흔적이 천천히 세계에서 상실되어 갈 차례이다. 이 절차에 그녀는 아까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후 그녀는 교회에 매주 갔다.

 

그녀가 교회에 들어섰을 때 파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단상의 중앙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옅은 황토색 벽을 뒤에 두니 푸른색이 반사하는 빛을 눈은 더 강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몸통과 위로 흔들리는 팔은 시야에 잔상을 묻혔다. 잔상인지 미지의 기운인지 모를 옅은 파랑 광선은 단상 가운데에 선 그의 몸 주위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저런 색의 옷이 처음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가 가진 원인 모를 힘은 그녀를 믿음의 영역에서부터 끌어들이고 있었다.

“자... 먼저 우리가 이끌어낸 경사스러운 성과부터 함께 축하하면서 시작하도록 하죠. 단체의 농산물 판매 수익금이 작년도 동일 분기 대비 20%나 증가했습니다!”

사람들은 박수와 작은 함성으로 서로에게 축하의 말을 건냈다.

“좋아요. 다 좋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성장에 기여하신 분들, 무엇보다 우리 여러분들, 많은 곳에서 힘 써주시는 우리 직원분들 그리고 항상 응원해 주시는 태양과 달과 지구에게 돌리겠습니다. 태양, 달, 지구, 이들이 하나라도 더 있었거나 덜 있었다면... 저런, 태양 빼고는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

사람들은 탄성과 함께 웃음을 내뱉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그 숫자들은 바뀔 일이 없어요. 진리잖아요. 태양과 달과 지구는 하나다. 이건 진리죠. 영원히 바뀔 수가 없어요. 그래요, 좋습니다... 진리, 좋죠. 그리고 우리에게는 다른 진리들도 있죠. 아마 저희 단체에 속해있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훨씬 많이 진리들을 끌어안고 있을 겁니다. 진리라는 건 바뀌지 않는 세상의 규칙, 우리들의 영원한 꿈이에요. 역시 세상에 진리만큼 안정적인 대상은 없어요. 맞아요, 맞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그 진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여러분들, 저 그리고 우리 직원분들인 겁니다. 여러분들의 도움과 응원에 힘입어, 열심히 일들을 실행해 나가는 것이죠. 모두의 노력의 결실로, 우리 단체는 역사상 어디에서도 유례없는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된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로 그 안정이 우리에게 어떻게 찾아왔는지. 우리들의 노력과 열정과 비전으로 모두 함께 이루어낸 겁니다! 물론 실무적인 업무들은 우리 직원들의 뜀으로 채워나간 것이지만, 여전히, 여러분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저희를 키워 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단체의 수익 증가는 이 귀중한 안전을 더 견고히 만들 것입니다. 더 많은 자금은 다른 무엇도 아닌 모두의 안정을 위한 여유로운 운영에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죠.”

 

다음 분기도 20%만큼은 아니지만 판매 수익금이 꽤 증가했다. 생산량 자체는 크게 늘지 않았지만 대외적인 판매가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과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내일 교회를 다녀오고 좀 이른 저녁에 사 채워 넣어야 할 것 같다. 그때 그녀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그녀에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갑게, 그리고 조금은 멋쩍게 인사했다.

“어 뭐야. 너 죽은 줄 알았는데.”

그는 그녀의 말을 장난스러운 대답으로 넘긴 후 다시 여유로움을 찾은 듯 집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문을 끝까지 열고 발을 들이자 다시 사라져 버리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했다.

“아니 그니까 이게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너 진짜 갑자기 사라져서 죽은 줄 알았다니까. 여기서 사라진 거면 죽은 거 말고 뭐가 있어.”

“아니야, 진짜 뭐 그런 일은 없었어. 걱정해 준 건 고마운데 그냥 일이 바빠서 그래 일이 바빠서. 그때 말한 거 있잖아, 아저씨에서 일하는 거.”

“그래서 갑자기 찾아온 건 뭐야. 일이 좀 여유가 생겼어? 그럼 뭐 연락이라도 좀 하지.”

“아니 그냥 때려치웠는데. 이상해서.”

“어? 때려치웠다고? 아저씨 직원 일을? 아니 잠깐만 일단 일로 와봐. 앉아서 얘기해. 그래서 뭐...뭐라고? 뭐 거기서 뭐 무슨 일 있었는데.”

“그니까... 이게 처음에는 그냥 그랬어. 그냥 뭐 3급 관리, 2급 관리. 그냥, 그냥 직원 같은 일들 했다니까. 그런데 좀 이상했던 게 4급을 맨 마지막에 보여줘. 아저씨 1급 센터 작동도 막 볼 수 있는 그건데 4급만 뭔가 숨기는 것 같았다니까. 이게 숨긴다는 말도 뭔가 좀 느낌이 다르기는 한데 그냥 딱 이상하잖아. 1급이 2급보다 중요하고 2급이 3급보다 중요한 건 맞는데 4급이 뭐가 다르냐 이거지.”

“음... 그건 뭐 그렇긴 하네.”

“그니까... 걔네가 알려준 게 4급은 사람이 해.”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 아저씨 4급 센터에다가 말하면 사람이 답을 준다고.”

“어? 그럼 너도 그 일 하다 온 거야?”

“아니 나는 그냥 관리만. 3급이나 2급 가끔 가서 보는 거만 하는데. 4급은 작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람이 일하더라고. 4급 센터들은 지금 거의 다 그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 많은 걸 어떻게 사람이 다 해.”

 

 

13

 

명찰을 아무리 강하게 눌러도 찌익 하면서 거품이 미세하게 이는 소리만 났다. 이런 기분 나쁜 소리마저도 피가 마르고 색을 굳혀버리면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에 살아있는 하은이에게 계속해서 질문했다. 사실 살아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하은이는 그녀의 머릿속 어디에도 실존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야가 어떤 미지의 공간으로 이동해 하은이와 마주 보고 대화한 것도, 공간을 깨고 들려오는 목소리와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 잔여물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그녀와도 어째선지 대화할 수 있었다.

많은 종류의 질문이 기본적으로 묻고 있는 것은 ‘왜’였다. 그리고 제각각의 길이를 가지는 각각의 질의응답은 항상 그녀의

‘아니야, 진짜 너는 죽었잖아.’

라는 말로 끝맺었다. 긴긴 내면의 대화 속에서 이 사실을 깨닫기는 꽤 어려웠다. 아마 살아있는 하은이가 아니어서 그런지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명쾌히 답해주지 못했다. 그러다 ‘왜 그런 선택을 했어?’가 ‘왜 나한테 이런 일만 일어나는 거지?’로 바뀌자 답변은 조금씩 진전해 나갔다. 본인이었어도 대답 못 했을 남에 대한 깊은 질문을 자신에게 하니 좋은 답을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바뀐 질문의 맹점은 어떻게 보면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다른 세계’라는 만능의 모범 답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식장에서 나와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버스에서 한 번 더 그 뒤틀린 패션 디자이너를 만나버린다면 아예 이 세계에 진저리가 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지 않으면서 생긴 40분의 산책 시간 동안 마음 정리나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여느 때처럼 존재하는 사람들을 알 수도 없이 바꿔버릴 거라는 그 변화가 자신에게만 크게 다가올 수 있다. 다른 세계가 품었던 태초의 균열은 이제 그녀에게 거대한 무언가로 변모해 다가오고 있었다. 크나큰 어색함은 세상을 보는 그녀가 기본적으로 이를 불안하게 어긋난 배경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문제는 지금 당장 발산하고 있는 이 변화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두의 주위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고? 터져서?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상은 너무나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적어도 세상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그러했다. 그 변화는 오직 그녀만을 대상으로 두고 일어나는 움직임일 것이다. 아무도 변화와 이를 맞이하는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움직임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나 단체가 행하는 일이라면 목적을 알아야 대비도 예방도 적절히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 목적이 없는 현상은 그냥 마주해야 한다. 그게 모든 것의 대부분이다.

그러다 그 여러 변화를 사람에 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화를 겪는다.’ 그게 전부다. 모두에게 그렇다.

 

집 현관문을 열자 무언가가 불타는 냄새가 났다. 불투명한 연기가 천장에서부터 자욱히 쌓여있었다. 연기가 시야를 가리자 그녀는 자세를 낮추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가스레인지에서 발생해 주방 전체로 퍼져나가 있었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가는 길에는 그녀의 어머니의 시체가 있었다. 어머니의 목에 깊숙이 박힌 칼은 그녀의 숨통을 끊었다. 흥건한 피는 주방 쪽으로 흘러 들어가 얕은 부글거림과 함께 끓었다. 이제는 검붉은 찌꺼기가 되어 열기에 거품을 만들고 동시에 터트리며 기괴한 운동을 지속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움켜쥐려다 결국 그러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목에 박힌 칼 손잡이에 양손을 감고 있었다. 혹은 움켜쥔 상태에서 차마 손을 내리지 못하고 죽은 것일 수 있다. 불길은 무섭게 위로 뻗으면서 그녀의 몸을 계속 데우다가 이제는 완전히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의 목에 이리도 정확히 칼을 꽂아 넣을 사람이 누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게 너가 쓴 소설이라면, 생각으로만 만들어 낸 이야기라면, 지금 당장 달을 두 개로 만들어줘. 내가 확신할 수 있게.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이 말을 하고 난 뒤 그녀는 자신의 하늘에 몇 개의 달이 떠 있는지 확답할 수 없었다.

 

 

 

 

 

 

II

 

 

그녀가 발견한 어머니의 목덜미에는 뜨거운 열기에도 다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광택을 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질척한 혈흔에 선명하게 상 매쳤다.

 

그녀는 피할 수 없는 변화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그리고 그 개념이 가진 속성에 대해 강한 불쾌함을 느꼈다. 지금 바로 피할 수 없는 변화는 없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생기지 않았지만 그건 별도의 문제였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목적을 가질 대상을 생각해냈다. 하은이의 죽음, 화제와 어머니의 죽음. 어쩌면 한울이의 죽음까지도 모두 자살로 철저히 위장되었다. 그렇다면 그 조작에 가담하는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진 어떤 대상이 있을 것이다.

하은이가 죽은 날을 떠올렸다. 그날 버스 속의 남자가 자신과 같이 내려 그에 대해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한 정거장 뒤, 그다음은 하나 앞. 마지막 하나 앞에서 진짜 위치를 파악하고 내린 듯했다. 만난 이후 초반 두 번 동안은 그녀가 의도해 외진 길로만 걸어갔다. 바로 따라오면 의심받기 쉬워서 기다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어떤 대상은 집에서 그녀를 만나려고 일을 꾸민 것이 아니었다. 출퇴근길에 정거장을 계속 엇갈려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직접 행동하려는 마음을 접었을 수 있다. 고 그녀는 생각했다. 무엇이 됐든 그것은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처참히 죽여갔다.

 

집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정거장을 바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용건이 끝난 것인지 집으로 행하는 버스에는 그 어떤 사람이 없었다. 집에 들어서 검게 탄 주방으로 향했다. 그 속에서도 전체가 금속으로 된 주방 칼은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조금만 그을린 채 남아있었다. 그대로 꺼내 들어 겉을 한 번 문지른 후 가방에 넣었다.

지문이 칼몸 위를 훑으며 매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을린 부분은 촉감까지 똑같았지만 마치 여러 색을 투박하게 섞어 어두워진 아크릴 물감 혼합물처럼 광택을 잃은 상태였다. 각도를 달리해 가며 유심히 관찰해 보았지만 언제나 빛은 그 부분에 닿자마자 얇지만 깊은 그 기묘한 어둠에 빨려 들어갔다.

다른 장소를 구하기 전까지 묵기로 한 지인의 집으로 향했다. 버스에는 역시나 그 남자가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올바른 정류장에서 내리자 그 남자도 곧바로 따라 내렸다. 일반적으로 가는 길이 아닌 외진 골목으로 향했을 때도 여전히 그녀의 발자국을 따르고 있었다. 그 골목은 꽤 길게 다른 길가로 뻗어나가지 않고 한 줄기를 유지하는 골목이었다. 그녀가 골목을 지나는 중에 갑자기 멈춰서자 남자는 당황한 듯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는 속도를 낮추었다. 꽤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뒤를 돌아 그의 왼쪽 허벅지를 칼로 찔렀다. 그리고 비슷한 자리를 칼의 방향을 틀어 한 번 더 찔렀다. 바로 옆에 놓인 대형 분리수거함에 부딪히며 바닥에 쓰러지려 하는 그를 붙잡아 그곳에 넣었다. 남자는 다리를 붙잡고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가 흐르지 않게 왼쪽 다리를 분리수거함 벽면에 걸쳐 놓았다.

“너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계속해서 따라다녔잖아요. 저 어디 가는지도 다 알고 있었고. 하은이랑 엄마 죽인 거 맞아요?”

“아, 나는 이런 거 하고 싶지 않았다고. 나한테만 왜 이러는 거야.”

“죽인 거 맞아요?”

“알았어. 어 맞아. 다 말해줄게. 그러니까 살려줘.”

 

그녀는 희미하게 그럴 것이라 답했다. 그는 그 옅은 소리를 붙잡고서는 조금은 고통이 가신 것처럼 말했다.

“우린 영원한 안정을 위하는 곳이야. 그런데 누군가한테 막 알려지면 이, 이 안정이 깨지잖아. 근데 최한울, 걔가 직원이었다가 그만둬버렸어. 그니까 그 사람만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직원이 바깥에 남긴 흔적들을 싹 다 지우는 거야. 기록이나 알고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싹 다.”

“근데 하은이는 왜요. 아예 다른 사람인데.”

“너도 거기에 포함될 거 아니야. 그런데 너무 안 죽어. 깔끔하게 자살로 처리하기 너무 어려웠다고. 그래서 자살시키려고 이러는 거야. 어쩔 수가 없잖아?”

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 다음 질문을 생각하는 것인지, 남자의 답을 다시 한번 곱씹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럼 다음은 서현이에요?”

“어? 이서현? 그, 그래 뭐 그러겠지”

“그러겠지, 라고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 진짜라고. 전 직원들, 주변인까지 싹 다 죽이는데 그런 걸 알려주겠어?” 남자는 힘겹게 숨을 쉬어대면서 말했다. “아... 진짜 나도 이런 일 하기 싫어. 근데 그렇다고 안 하면 나도 죽는다고. 나도 그냥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숨소리만이 둘 사이에 있었다.

“그래, 푸른이란 곳이야. 푸른 농업. 진짜로 그게 끝이야.”

“아 맞다. 이름이 뭐에요?”

“양정산. 양정산이야... 이게 마지막이야? 살려주는 거 맞지?”

그녀는 분리수거함에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칼로 그의 목을 찔렀다. 피가 더 빠르게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칼을 뺏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피를 뿜어내다 금세 죽어버렸다. 그녀는 칼을 다시 목에 난 구멍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의 힘 빠진 두 손으로 칼 손잡이를 감쌌다. 공간이 부족해 몸이 조금 구겨졌을 뿐이지, 그녀의 어머니가 부자연스럽게 죽어 있던 모습과 윤곽이 얼추 비슷하게 잡혔다.

비닐장갑을 뒤집어 벗고 가방에 뭉쳐 넣었다. 라이터로 비닐장갑에 불을 붙여서 그의 시체를 집어삼키게 하고 싶었다. 동시에 가방에서 물티슈 세 장을 꺼내 팔에 묻은 자국을 최대한 지우고 바로 앞에 버렸다. 분리수거함 뚜껑을 닫은 뒤 이서현의 집으로 향했다.

 

 

14

 

“여기가 바로 아저씨가 있는 센터에요. 센터는 총 1급부터 4급까지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의 심각성이 높을수록 더 낮은 숫자의 센터로 찾아가면 돼요. 여기는 3급이네요. 3급에 해당하는 곳은 아저씨에게 음... 일상적이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은 윤리적인 갈등 같은 것을 물어본다고 생각하면 쉬워요. 그리고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뭐 웬만하면 다 3급 이하에서 처리하는 게 기본이에요. 사실 여기서 살면서 1급에 찾아가야 할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고 보면 돼요.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다 또 전문 안내자분들이 잘 이끌어 주실 겁니다.

그래서 들어가면 이렇게 두 명이 마이크 앞에 서고 한 명씩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거에요. 뭐 아무 부담 가지지 말고 일어난 일과 자신의 상태만 명확하게 말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아저씨가 상대의 말을 듣고서 판단해 줄 거니까요. 얼마나 정확하던지 제가 설 곳이 없어질 것 같았다니까요. ‘노인의 지혜’ 이런 거 말이에요. 그게 사라진 거 같다고나 할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 작품들을 접하다 보면 ‘노인’ 같은 존재가 가지는, 특히 주인공과 가까운 노인이라고 했을 때 생각나는 특징들이 있잖아요. 주로 지혜롭고 착하고, 젊은 주인공의 영적인 조력자가 되어주기도 하고, 책의 평화롭고 포근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신비한 단어 같아요, 노인이라는 게. 그러니까 노인이라는 단어가 소설에 등장하면 그 인물은 시간의 축적이나 인간 삶의 몇 가지 중요하고 긍정적인 부분을 직접적으로 상징하기도 한다는 거죠. 물론 제가 그런 엄청난 것들을 상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노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뭐 마을에 노인이 딱 한 명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죠.”

 

밖에서의 경험이 전무한 농사는 다른 생활 요소들과 달리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노부인이 권한 감자 농사라 해도 땅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물은 언제 줘야 하는지, 그것 말고도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감이 없었다. 갑자기 빠르게 잘 자라는 것 같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부 시들어 버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요, 맞습니다. 저희야 밖에서도 농사짓다 온 사람들이라 완전히 공감할 순 없어도 처음 시작할 때의 그 난감함은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안타깝지만, 농사에 대해서 저도 별 드릴 수 있는 말이 없네요. 그저 계속 실패하면서 기른 감으로 위기를 하나하나 넘겨 갈 뿐, 남에게 설명해 줄 정도로 정확히 알지는 못해요. 그래도 제 남편에게 물어보면 꽤 도움이 될 만한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거에요.

저도 이 제안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군요. 남편은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데에, 기본적으로 남을 대하는 데에 친절함은 타고나지 않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농사일 관한 지식 하나는 믿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말을 할 때면 이것 하나만 알아주세요. 그 사람은 절대 그 누구에게도 적개심에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아요. 착한 마음으로 온 힘 다해 노력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잘 이야기해 볼게요.”

덕분에 간단한 농사가 잘 끝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15

 

“어, 왔구나. 너 진짜 괜찮아? 진짜... 이리 와”

서현은 현관 앞에서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는 서현의 품에 안겨 그녀의 어깨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아이 뭐 그냥... 고마워. 피곤한데 먼저 들어가도 될까?”

“어, 그래 그래. 쉬어. 나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녀는 상자에 담겨있는 그녀의 옷을 조금 뒤적거린 뒤에 아무거나 꺼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빠르게 씻었다.

그녀가 샤워를 끝내고 거울 앞에 섰을 때는 주기적으로 샤워기에서 물방울이 타일 위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만이 그곳에 울렸다. 세면대를 두 손으로 움켜잡으면서 나는 덜컹하는 작은 소리도, 그녀의 몸에 남은 물기가 흘러내리는 소리도 없었다. 화장실 바깥에서도 서현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 떨림도 없이 조용했다. 그 밀도 있고 견고한 고요에 물방울은 뚝뚝하는 소리를 내며 균열을 가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그 고요가 영원히 깨져 버릴 수 있다는(이를테면 서현이가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불안감을 그녀에게 심어주었다. 그만큼 옅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정적이었다.

그녀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김으로 뿌옇게 덮인 거울을 바라보았을 땐 어렴풋한 형체만이 있고, 구체적인 모습은 살펴볼 수 없었다. 명치 높이까지 내려오는 검고 부드러운 머릿결 말고는 지금 자신 앞에 있는 형체가 진짜 자신이라 확신할 만한 요소가 없었다. 머리카락과 피부의 경계에는 두 색이 흐릿하고 희미하게 번져 색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기이한 색이 보였다. 그녀와 뒷배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흰색 벽면 타일에 쏟아버린 수채화 물감 같은 것이 되어 자기 자신을 희석하면서 외부와 자신 사이에서 그 둘을 구분해 주는 선명한 선을 잃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 경계 잃은 형체를 주욱 응시하고 있었다. 볼 것이라고는 없는 단층적인 색감인데도, 그녀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양정산의 핏자국이 남긴 진한 잔상이 그녀의 영혼과 육체에게 이곳 바깥세상으로 오라고 끊임없이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유혹 앞에서 의도치 않게, 그녀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이 하나하나 주변 세계로 녹아 들어간다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강력한 소용돌이에 서서히 섞여 들어가면서 그 혼란에 발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불안정하고 위험하고 예상 적중이랄 건 없는 세계가 가진 막대한 인력을 그녀는 감각하고 있었다.

수건으로 몸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고 가지고 온 옷을 입었다. 흰 셔츠에 따뜻한 체크무늬 긴 바지. 그녀가 선호하는 조합의 잠옷을 갖추었을 때는 거울에 물기가 어느 정도 가셔있었다. 그곳에 비친 상에서, 그녀는 자신의 모습과 위치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육체와 달리 영혼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낮은 농도로 떠돌았다. 다시 그러모으려 손을 이리저리 뻗어보아도(물론 실제로 손을 뻗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들은 마치 고압 탱크에서 유출된 기체처럼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공간을 시시하게 부유할 뿐이었다.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고요 속을.

 

샤워실을 나왔을 때는 서현이가 그녀를 보고는 조금 놀라서 인사했다. 이에 그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를 미소를 보여주고 방에 들어갔다. 타이밍이 조금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녀 관계가 서로를 아주 사랑하는 편에 속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와 대화할 때 기본적으로 유쾌했으며, 진솔해야 할 때는 진솔했고, 이 둘을 적절히 배합할 줄도 알았다. 무엇보다 모든 상황과 이야기를 어린 그녀를 위한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학창 시절 자신의 불행하고 지루한 인생에 대해 어머니를 탓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속으로 질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결국은 멈췄다. 어머니가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마음이 더욱 편했으니까. 어쨌든 어린 그녀에게 어머니는 마치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가 그녀의 방을 찾아와 이야기를 들어줄 때면 어떤 심각한 어려움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의 그녀는 최근에 딱히 어려움을 겪은 기억이 없으나 만일 어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쉽게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믿었다. 둘이 아주 좋은 모녀 관계라는 사실을 변화시킬 만한 요인이 딱히 없었던 것이다. 횟수는 줄었지만, 어머니와 만나는 날은 그녀에게 아주 좋은 날이었다.

어머니가 눈앞에 있었던 여러 순간들이 마치 바로 앞을 지나쳐 달리는 자동차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많은 문제에 대한 답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어머니의 눈동자는 그녀를 조용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 여유와 통찰과 깊이는, 오직 그녀만이 체험할 수 있는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이 아름다운 상상과 회상 중간에 하늘에서 하나의 문장이 계속 꽂혔다.

어머니는 서너 달에 한 번 들러 하루 자고 가는 주기로 그녀와 만났다.

어머니는 정확한 날짜를 항상 말해주지 않아 ‘올 때가 됐는데...’하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온 단 하루 만에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상실된 것은 온갖 긍정적인 것들을 담고 있던 어머니의 눈동자와 그녀를 향한 하나의 사랑이었다.

양정산의 목에 박혀 있을 칼 위에 놓인 그을음을 상상해 보았다. 어머니의 눈동자와 칼의 그을음은 같은 검은색을 가지고 있었고 그 깊이도 같았지만,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대상이었다. 그을음의 깊이는 많은 것들을 빨아들여 소멸시키고, 눈동자의 깊이는 사람들을 포용해 온기를 이끌었다. 그을음의 색은 미묘하게 탁했고, 눈동자의 색은 바라볼수록 점점 명료해졌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절대로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양정산의 목에서 나온 그 말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푸른’은 폭력이고, 안정이란 위선으로 가린 변화이다.

침실의 불을 껐을 땐 달이 내린 푸른 빛만이 방안을 희미하게 활공하며 공기의 흐름을 초현실적으로 바꿔 놓았다. 그 뒤바꿈은 달이 두 개라고 해도 믿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은 차가운 색을 가진 공기 속, 그녀는 양다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뜨거운 입김의 흐름을 느꼈다. 고온의 공기 덩어리가 산맥을 넘어가듯이, 습기를 머금은 입김이 무릎을 감싸며 이동하는 과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무거운 공기는 정강이의 경사면을 타고 천천히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 파란빛 공기는 흩어져있던 영혼도 어느 정도 뭉칠 수 있는 상태로 냉각했다. 그녀는 한 팔로 영혼을 수집하고 나머지 손 위에 그 형태를 잡아갔다. 모두를 하나의 덩어리로 모으고 나서, 그녀는 그 뭉치를 작고 보호가 필요한 설치 동물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제법 견고하고 안정된 작은 공이었다. 동시에 불안정함도 있었다. ‘이런 모습이고, 이렇게 생겨났다’라 설명할 순 없어도 분명히 만연하게 존재하는 불안정함이 있다.

 

 

16

 

“내가 괜한 말을 해서...”

 

노부인은 호흡을 진정시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부인의 눈빛은 또렷했지만, 그 또렷함은 그녀에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처음부터 새로 구축해 낸 또렷함이었다.

“밖으로 나가 볼까요?” 노부인이 긴 정적 끝에 말했다.

 

골목을 노부인과 나란히 걸어가며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람이 그녀의 등에 부딪히면서 우아하게 휘어지는 곡선을 눈으로 그렸다. 그녀는 양쪽 허리에서 그 휨의 부드러움을 피부로 느꼈다. 그리고 뒤쪽 저 멀리 있는 건물에 바람이 긁히며 나는 아득하고 집약된 소리를 들었다.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하는 그 웅장한 소리는 그녀를 아주 깊게도 푸르른 어느 자연 한 가운데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그 바람의 냄새도 그녀에겐 기분 좋게 느껴졌다. 깨끗한 물이 가득한 장소에서 울리는 청량한 냄새와 따뜻한 곳에서 피부로도 느껴지는 듯한 푸근한 냄새를 잘 배합해 놓은 향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 어린 시절을 떠올리도록 만들, 특별한 기운을 가진 공기다. 봄날의 노란 달빛을 예쁜 찻잔에 휘휘 저어 녹여 낸 듯한, 정감 가는 바람이었다.

그 거리에서는 시야를 채우는 고운 빛깔도 일품이었다. 주황색과 갈색 계열의 색이 주를 이루고 전체적인 빛의 세기도 자극적이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쓰다듬는 듯한 온정이 느껴졌다. 노부인은 그녀 옆에서 확신에 찬 걸음걸이와 자세로 명확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나이대를 고려하고 나서도, 여전히 힘차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기 확신만큼은 노부인의 몸속에서 일종의 무게추 역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힘 빠져서 그만두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가는 움직임이었다.

그런 요소들에 둘러싸인 채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 역시 걸음을 내딛는 데에 자신감을 얻은 느낌이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해도 좋을, 저녁 산책 같았다.

 

“여기가 바로 아저씨가 있는 센터에요.”

 

 

17

 

그 불안정한 공을 오랫동안 품고 있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바닥은 작디작은 허공을 감싼 채 옅은 열기를 발하면서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파랗고 서늘한 공기에서 자연스레 이는 잔잔한 너울을 그 공 대신 계속해서 받아냈기 때문이리라.

 

그 작고 소중한 영혼 덩어리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녀가 계속해서 온기를 나누어주다가 시간이 되어, 그 공이 마음을 열고 다시 그녀의 가슴속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그다음에는 찻잔에 티백을 걸쳐 놓았을 때처럼, 영혼이 천천히 확산하여 그녀의 몸 구석구석까지 온기를 전달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확산은 희뿌연 거울 앞에서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때는 허무한 고요와 공간을 가로지르며 저 멀리 떠나갔고, 이때는 정해진 용기 하나를 끝까지 매웠다. 인간의 온도를 되찾은 몸은 입에 희미한 미소를 걸어두고 그녀의 정신 앞으로 자애로운 휴식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그 정도의 평안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그 불안정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순간에 그대로 소멸해 버린 것이다. 영혼이라는 게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존재였던 걸까.

살려달라 애원하는 양정산의 목에 칼을 꽂아 넣어 죽였던 장면이 그녀의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의 눈동자에서 ‘인간의 것’이라 할만한 빛깔이 희미해지는 과정을 그녀는 내려다보면서, 찬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와 죽어가는 양정산 사이에는 불투명하고 질긴 막 하나가 형성되었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있는 공간을 구분해 주는, 얇고 탁한 막이다. 그 얇은 막 때문에 그가 내뿜는 최후의 생명력이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간 것 같았다. 본래 피에 녹아있던 양정산의 영혼이 쓰레기들 사이로 스며들면서 그의 몸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광경이 희미하게 보였다. 촉촉했던 안광이 바래면서 짙은 공허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그 교환을, 그녀는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칼몸에 남아있는 그을음과 그 기묘한 어둠이 그녀의 몸에서 영혼만을 골라내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을음의 흡수와 자신의 소멸에 그녀는 대응하지도, 그것을 감지하지도 못했다. 그을음이 깊은 어둠 어딘가, 자신만의 저장공간 같은 곳에 그 영혼을 옮겨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삭제해 버렸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어둠은 지금 양정산의 목 안에서 그의 피로 적셔지고 있다.

냉각된 영혼을 그러모아 하나의 공으로 뭉쳤던 행위는, 차가운 달빛만이 가득한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젓는 기행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공기 덩어리를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으로 품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영혼과 생기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정말로 어머니의 검은 눈동자가 건네주었던 노란빛의 사랑이 상실되어 버린 것일까.

지금 내 육체에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그녀는 이 질문을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 아주 얕고 긴 잠이었다. 정오가 다 되어서 깨어났음에도 진짜로 잠 들었던 것인지 의문이 드는, 그런 얕은 잠이었다. 방에서 나와 거실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어젯밤 침실에 배어있던 달빛의 서늘함의 흔적이 여전히 등골에 남아있었다.

서현은 일하러 가 집에 없었다. 대부분의 학교가 방학 중인 시기긴 해도 바깥에 사람이 많이 돌아다닐 시간은 아니었기에, 빈집에서 깨어났을 때의 그 고요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평화로우면서도 외로운 감정이 그 공간을 불완전한 틈을 둔 채 메우고 있었다. 그 특유의 공기를 여러 번 깊게 들이키면서, 그녀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내재하고 있는 채울 수 없는 공허를 느꼈다. 공허는 그녀 속에서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며,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는 존재들을 깊은 검은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공허는 섬뜩하게도 아주 느리지만 분명히, 자신만의 공간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 끊임없는 확장에 잡아먹혀 버리지 않으려면 그녀는 색채가 있는 남은 것들을 지켜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지금까지 빠져있던 잠에서 깨어나, 행동해야 했다. ‘푸른’을 향해서. 정말로 그 변화가 불가피한 것이더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 상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그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푸른’은 죽은 양정산이 말한 그대로 푸른이라는 이름의 농업단체였다. 모든 구성원이 우호적으로 협력해 운영의 기반을 다지는 공산 체제의 대규모 공동체에 가까웠다. ‘푸른’의 농산물을 이용한 사람들이 값싼 가격과 좋은 품질에 대해 만족하는 자료는 많았지만, 정작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지 못한 모습이었다. 마치 입소문이 과도하게 퍼지지 못하도록 무엇인가 수상한 공작을 취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온 힘을 다해 당장의 폐쇄적인 태도를 고수하려는 발악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수없이 많은 탈과 거짓을 얼굴 위에 두텁게 쌓아 올리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직감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푸른’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해당 단체에서 직접적인 접촉이 먼저 있어야 했다. 개인의 일방적인 지원으로 인원을 충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조사원 역할을 하는 직원들이 외부에서 ‘푸른’에 적합하거나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모아온다. 직원이라던 한울이도 그런 조사원 같은 존재였던 걸까. 최한울도 그냥 양정산과 같은 ‘푸른’의 부품 중 하나였던 걸까.

‘푸른’의 장인 최종민은 노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나이 든 남자였다. 많은 사진에서 그는 회색 정장을 걸치고 다른 노인들과 악수하고 있었다.

 

 

18

 

그녀가 그 집 앞으로 다가가자 존 덴버의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의 멜로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마 집 내부에서 아주 크게 재생되고 있는 모양이다.

초인종을 누르자 몇 초 후에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노랫소리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현관 쪽으로 다가오는 재빠른 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자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노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미국 로드무비에서 초중반쯤 등장해 주인공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는, 살집 좀 있는 그런 노부인 말이다. 조금 곱슬거리는 백발의 긴 머리카락이 넓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슴 부분에 큰 직사각형 무늬가 있는 큰 검은색 티셔츠와 양쪽에 흰색 스트라이프가 나 있는 파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많은 면적을 드러내는 피부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몸 전체를 보았을 땐 결코 신체적으로 약한 노인이 아니었다. 푸근한 이목구비 선이 진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또렷하고 깊은 눈망울은 그녀를 보고 눈웃음 짓고 있었다. 낮은 편의 코, 연한 분홍빛의 작은 입술과 봉긋하게 튀어나온 부드러운 광대의 움직임을 통해, 노부인은 말을 시작하기 전부터 그녀를 환영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말 잘 왔어요. 푸른에서 새로 시작한 생활은 어떤가요?” 노부인은 그녀를 정말로 환영하는 말투로, 정중하게 말했다.

“아... 저는 뭐... 그냥 적응하는 중인 것 같아요. 그래도 여기 느낌은 좋은 곳 같던데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요, 공기도 좋고,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는 것이죠.” 노부인은 미소를 선명히 뽐내며 말했다. “제 집에선 편하게 있어도 됩니다. 그러라고 당신을 저한테 보내준 거니까요.”

노부인의 집 내부 구조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집과 거의 동일했다. 몇몇 가구가 비교적 고전풍으로 바뀌어 있고 대부분의 생활 공간에서 사용의 흔적이 눈에 선했다. 그러한 흔적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부인의 집에는 그녀의 것에는 없는 특별한 공기가 깃들어 있었다. 연례 행사로 왁자지껄 모인 친척들과 함께 해질녘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저녁 식사를 할 때의, 사람을 재생시키는 힘이 있는 그 푸근한 공기가, 미세하게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그 공기는 마치 눈 바로 앞에 주황색 필터를 씌운 듯, 어릴 때의 시선으로 물체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냥 부모님과 친척들과 있는 것이 좋고, 언제나 행복하게 뛰놀 수 있었던, 모두가 그리워하는 그 주황빛 시절 말이다.

그녀가 거실에 놓인 초록색 가죽 소파에 앉아 바깥은 보며 생각하고 있던 사이에, 노부인은 두 개의 찻잔과 두 개의 주전자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 왔다.

“홍차 좋아하나요? 제가 차를 뜨겁게 먹는 편이라서요, 온도를 보고 여기 미지근한 것과 섞어 먹어도 돼요.”

그녀는 주전자를 들어 뜨거운 홍차를 찻잔의 절반 높이까지 따랐다. 그리고는 후후 불어 온도를 가늠한 뒤에 미지근한 홍차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아, 저기는 제 남편이에요. 인사도 안 하는 거 보면 정말... 워낙 말 트기가 어려운 사람이에요. 그래도 속마음은 언제나 착한 남자랍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대화할 일이 생기면 기억해 두세요.”

“남편분을 정말로 사랑하시네요.” 그녀는 미지근한 홍차를 찻잔의 3분의 2 높이까지 따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특별한 공기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다른 가족분들은 안 계신 건가요? 그, 다름이 아니라 집에서 뭔가 정감 가는 공기가 느껴져서요. 가족이 여럿이서 함께 있을 때의 향기 같은 거요. 이런 건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 내기가 어렵잖아요.”

“가족이요?” 노부인의 눈망울은 순식간에 빛깔을 잃어갔다. 입술이 가진 분홍색이 더 옅어지고, 얼굴 피부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면 정말 죄송해요. 그냥 답 안 하셔도 돼요.”

“아니에요.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노부인은 찻잔에 뜨거운 홍차를 가득 담아 들이키고 뜨거운 입김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찻잔 너머의 주전자 바로 위를 응시했다. 노부인의 눈은 안광을 서서히 되찾아 갔지만 바라보는 곳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그 정적 속에서 집안의 공기가 그녀에게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푸른에 오기 전에... 아들, 아들이 하나 있었죠. 정말 씩씩하고 잘 큰 외아들이었어요. 최대한 사랑으로 키워 내려 했어요. 저희 부부는 평생을 농사만 지어 왔는데 아들은 신기하게도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어요. 동시에 농사일도 개을리하지 않고 배우고, 일손으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냥 배우는 거 자체를 좋아하고 잘하는 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도 멀리 떨어진 좋은 곳, 원하는 곳으로 갔죠. 가끔씩 집에 찾아올 때마다 타지 생활에 힘들어하는 게 보였는데... 저희는 할 수 있는게 없었어요. 뭐, 다시 농사하러 여기로 오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냥 꿈을 이뤄서 행복하게 살아 나가길 바라고 응원할 뿐이었어요. 그렇게 올 때마다 안아주고, 아들은 회사에 들어갈 때까지 왔다 갔다를 반복한 거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찾아왔어요. 집으로 오고 싶어서 회사에 휴직을 내고 왔다면서요. 그렇게 입고 있던 정장 그대로 갈아입지도 않고 논에서 이것저것 하다가 들어갔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에요. 밥 먹고, 방에 들어가서 자고만... 저랑 이야기도 별로 안 했어요, 그때는. 그렇게 엄마랑 얘기하는 걸 좋아하던 애였는데... 그래서 제가 말했던 게, ‘정 그러면 논에서 뭐라도 좀 해봐라. 어릴 때 추억도 있고. 이렇게만 있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 했거든요. 그렇게 말 한 번 했는데, 그날 밤 그 애가 죽었어요. 밤새 창고에다 밧줄 걸어서 목매고.”

노부인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집안 어딘가에서 노래의 후렴구, ‘Take me home, Country Roads.’의 반복되는 울림이 들려왔다. 멜로디와 함께 노부인이 말했다.

“내가 괜한 말을 해서...”

 

 

19

 

‘푸른’의 사무실은 당장 지금 이서현의 집 근처에도 있었다. 골목길을 통해 걸어가면 십 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그 유일한 사무실에 최종민이 있을 것이다. 최종민은 전체 중 농업단체로서의 ‘푸른’의 대표 역할을 맡은 직원이었다. 그런 사람이 단체의 거점인 농장에 상주하고 있을 가능성은 낮다. 최종민 뒤에 어떤 거대한 것이 숨어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채로 남아있지만, 그 말고는 당장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서현이는 밤 9시가 넘어가도록 집에 돌아오지도, 연락에 응하지도 않았다. 평소 같으면 일을 5시에 끝내고 6시 전에 집으로 와 그녀와 무언가를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와는 다르게 그녀와 이야기를 시작했을 수 있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재미있는 추억거리들처럼 평범한 이야기로 시작했을 것이다. 밥을 다 먹고 나선 거실 소파 위에 나란히 앉아 더 깊은 주제로 대화를 이어간다. 한울이, 그 다음엔 어머니. 그러한 심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재생시키는 강력한 힘을, 이서현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 둘의 죽음이 ‘푸른’이라는 농업단체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나 이하은이라는 학생의 기이한 죽음도 이와 비슷하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다. 아니면 반대로 서현이에게 이끌려 전부 입 밖으로 꺼내 버릴 수도 있다. 나를 꼬옥 안아주는 서현의 품속에서 그 어깨 위에 머릴 얹고, 귀를 향해 모든 진실을 전부 쏟아내 버릴 수도 있다. 지금 하늘에 뜬 달이 몇 개냐고 물어보면서.

그러나 그녀가 어떤 말을 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녀는 이서현이 없는 집에서 차갑고 외로운 공기로 호흡하며 침묵할 뿐이었으니까.

 

그녀와 이서현은 고등학교 1학년 처음 만나 지금까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왔다. 그녀는 그때 중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수학을 아주 잘하는 여학생이었고, 서현은 모든 과목을 적당히 잘하는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먼 타지에서 이사 온 서현은 새로운 동내의 여자 고등학교에 입학해 친구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둘 요령이었다. 그녀 또한 서현의 일 순위 타겟이 된 같은 반의 여고생 24명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서현을 처음 보고는 놀랐다. 중학교 때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민망하고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만 학생들과 안면을 트고 조금의 친구들을 확보해 놓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진한 검은색의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올리고, 환하게 웃어 보이며 첫인사를 건내는 서현의 모습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1학년이 끝나갈 때쯤 그녀가 서현이를 포함해 서너 명 정도의 친한 친구를 확보했을 때, 서현에게는 그녀 한 명 말고 단 한 명의 편한 친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게 말을 걸 수 있는 학생들은 그녀의 반 친구들을 포함해 아주 많았지만, 그녀처럼 친한 친구라 할만한 사람은 그중에 하나도 없었다. 그토록 밝은 에너지를 가진 서현이가 한 학년을 그런 식으로 마무리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어떤 사건이나 쉽사리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물론 그러한 짐작도 서현 바로 앞에선 꺼낼 수 없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한울이의 말에서 서현의 모습을 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학년 1학기의 기말고사가 끝나고 떠난 수학여행이 기억에 남는다. 그저 그런 프로그램들로 평범했던 수학여행 자체가 아닌, 이서현과 함께였던 어두운 방의 공기가 기억난다. 소등시간이 한참 지난 방에서 그녀와 서현은 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 상태로 쉬지도 않고 키득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같은 방을 쓰던 나머지 3명은 조용히 좀 하라고 짜증을 냈지만, 새벽 두 시가 되어서는 그냥 포기하고 잠에 든 것 같았다. 그 둘은 이야기를 끝내고 두 개의 베개 위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누워 미소를 지었다. 딱딱한 바닥 위에 얇은 이불 하나만을 깔고 옆으로 오랫동안 누워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오랜 시간 암적응을 해 서현의 얼굴 윤곽을 볼 수 있었다. 서현의 긴 머리카락은 목에 걸린 채 이불 위에 늘어졌다. 수다 떨 때는 느끼지 못했던 특별한 공기를 들이켰다. 얼굴 쪽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불 속 몸통과 다리는 땀이 조금 맺힐 정도로 따뜻했다. 숲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 냄새 같은 것도 났다. 그 공기 속에서 서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숨소리도 통제하듯이 견고한 침묵을 지키면서, 서현의 눈동자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검은 눈동자의 깊음과 맑음과 생기를, 그녀는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어머니가 자식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자식이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한 그 미묘한 시선은 그녀를 향한 채 밝게 빛났다. 긴 고요를 깨고 서현은 ‘이제 자자, 오래 얘기하니까 피곤해’라 말하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집어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다. 마지막으로 한 번 웃어 보이고 비어 있는 자신의 이불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갔다. 연한 하늘색의 잠옷이 사부작거리는 소리보다도 작은 발자국 소리였다.

그녀는 방금 전의 공기와 서현의 시선을 자신의 마음속, 깊고 소중한 곳에 간직해 두었다. 새벽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3학년 수학여행은 학부모들의 반대로 인해 취소되었다. 그리하여 이서현이 소등된 방 안에서 그녀를 특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후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그 서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름답고,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그 애절한 안광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는 소중히 간직했던 기억들로 눈앞에 이서현을 최대한 정밀하게 복원해 봤지만, 진짜 서현이 없이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대신 추측은 할 수 있었다. ‘푸른’이 서현이를 상실시켜 버렸다. 어머니처럼 목에 칼이 꽂거나, 하은이처럼 몸을 산산이 조각내거나, 한울이처럼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려, 영혼을 소멸시켰다. 나 때문에 또 하나의 소중한 존재가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는 주방에서 칼 한 자루와 비닐장갑 한 쌍을 챙겨 집을 나섰다. 칼은 형광등의 하얀 빛을 영롱하게 반사해냈다. 평소에 세척을 잘해 놓아 한치의 티도 없는 금속의 매끈함과 일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푸른’의 사무실로 향하는 골목길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어두운 하늘을 밝게 비추는 달빛을 느낄 수 있었다. 높게 뜬 달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잔상이 이리저리 섞이면서 달의 형체가 마구 바꿨다. 아무리 시선을 집중시켜도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흔들려서 잔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두 개의 달은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두 개가 되었다.

쏟아지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휘청거리다 보니, 어느샌가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은 싸늘한 상가 건물 3층에 있는 방 2개로 구성된, 말 그대로 평범한 작은 사무실이었다. 그녀는 작은 갈색 크로스백 안에 담긴 칼을 만지작거리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아, 안녕하세요. 푸른 농업입니다. 혹시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왼쪽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 직원이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남자는 그냥 삼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소매를 걷어 올린 흰 셔츠,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그냥 평범한 남자.

“저는 최종민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그 양정산씨 관련한 일이라고 말씀드리면 아마 아실 거에요.”

“네, 그럼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은 그녀를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주황색 2인용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최종민의 방으로 이동했다. 역시 양정산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듯했다.

그녀가 소파에 앉아 한 손을 크로스백 안에 넣어놓은 채로 30초 정도 기다리자, 직원이 다시 찾아와 그녀를 안내했다. 복도에는 방음 장비를 철저히 갖춘 녹음실 같은 묵직한 정적 속에서 환기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있었다. 유일하게 울려 퍼지는 위잉 하는 그 희미한 소리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이분이 양정산씨 일로 찾아오셨습니다.” 직원이 문을 열며 말했다. “그, 커피 드시나요?” 그녀의 끄덕임을 보고 직원은 돌아섰다.

문이 천천히 닫히자 최종민은 그녀에게 손짓을 하며 자신 앞에 놓인 의자에 앉기를 권유했다. 그의 손짓에는 알 수 없는 무게감이 가득 실려있어, 모두가 그 권유를 따를 것 같았다. 직접 마주하니 사진에서보다 몸집이 더 크게 느껴졌다. 굵은 몸통에 두꺼운 회색 슈트를 빈틈없이 걸치고 있는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유명 권투 선수가 은퇴 후 맞은 노년처럼, 정감 가는 눈웃음 뒤에 강력한 카리스마가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그, 양정산이 우리 쪽에도 갑자기 소식이 끊겨서 말이야. 뭐... 뭔가 변동이라도 생긴 게 있나?”

“아... 그런 건 아니고요, 저희도 그냥 연락이 계속 안 되기도 하고 해서요.”

“그래, 뭐 이게 한 두 번 있는 일은 아니긴 한데... 이게 워낙 특이한 경우여서 걱정이 되는 거지. 그래도 새 인원은 금방 바로 나올 거니까.”

“특이한 경우요?”

“어, 아마 양정산도 이 일은 몇 번 못 해봤을 거야. 계속 따라다니기만 하는 거.”

“... 그건 그렇고, 그 이서현 관련 일은 잘 처리된 거죠?” 그녀는 입이 말라가는 것을 참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뭐? 이서현? 벌써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이 됐나? 난 뭐 실질적인 건 아직 들은 게 없는데. 양정산한테 문제가 생긴 거면 이렇게 일이 빨리 될 수가 있나...? 그냥 기술적인 문제였던 건가?”

“...”

“그,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양정산한테서 소식을 받지도 않고 먼저 움직였을 리는 없잖아. 음... 아마 이건 그냥 일시적인 문제 같은 걸 거야. 그러니까, 우리 둘만 소식을 못 받은 거지. 일은 제대로 처리되고. 그 알겠지만, 나도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게 아니야. 오늘 아침에 새 인원이 나왔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그래서 확인해 보자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말로 인해 서현이의 상태가 묘연해졌다. 그리고 최종민의 말이 ‘푸른’의 실제 혼선인지, 그녀에게 행하는 기만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어젯밤 이 시간 즈음 침실에서 몸에 적셔졌던 달빛의 서늘함이 등골에서 다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수학여행 날 밤, 서현이가 주었던 그 눈빛이 그녀로부터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조그마한 사랑 한 조각은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 버렸다.

직원이 커피와 함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크로스백에서 칼을 꺼냈다. 매끈한 금속이 반사한 전등의 빛은 다시 한번 영롱하게 나아가 최종민에게 닿았다.

비닐장갑을 낄 여유 따윈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뒤로 돌아서 직원의 목에 칼을 꽂았다. 그대로 칼을 빼내자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바로 오른쪽에 있는 주황색 소파에 쏟아졌다. 동시에 직원이 들고 있던 종이컵에 담긴 믹스 커피가 그녀의 신발 위로 떨어졌다. 뜨거움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 삼십 대 후반의 남자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녀의 오른팔, 그리고 몸통과 얼굴의 오른편은 그의 피로 흠뻑 젖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이어갔다.

 

“아니야. 서현이는 이미 죽었어. 푸른이 죽였다고.”

“그럼 네가 양정산을 죽였겠군.” 그는 조금 고민한 뒤에 말했다.

최종민은 그녀가 직원을 죽이는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움찔할 뿐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칼을 든 상대에게 덩치만 믿고 무작정 달려들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미 알겠지만, 나는 최한울의 지인이야. 너는.”

“나도 그냥 직원이야. 저 남자처럼.” 최종민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명확하게 말했다. “그래, 네가 뭐 때문에 여길 찾아왔는지 알겠어. 근데 아쉽지만, 나는 네가 원하는 그 사람이 아니야. 대표 같은 게 아니라 언제나 바꿔 낄 수 있는 푸른의 직원 중 한 명이라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것 같아?”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당장 너가 나를 이 자리에서 그 칼로 죽인다고 해봐. 그럼 푸른은 새로운 노인을 가져와서 이 의자에 앉히겠지. 그건 네가 누구를 죽이든 마찬가지야. 그랬을 때 네가 얻는 건 도대체 뭔데.”

“난 뭘 얻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야. 잃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나한테 남은 소중한 것들.”

“아니야. 지금 너한테 남아있는 게 뭐가 있는데. 이서현은 죽고 너는 사람 세 명을 죽인 연쇄살인마가 되지. 네 진술은 법정에서 정신병 취급을 받을 거야.” 최종민은 숨을 내쉬었다. “너 같은 상대를 지금까지 푸른이 한두 명 만나 본 줄 알아? 푸른은 계속해서 존속할 거야.”

“... 도대체 뭘 위해 존속하는 거지? 너희들은?”

“이상한 질문이네.” 최종민은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푸른은 존속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해. 영원한 안정을 수호하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 그게 푸른의 존재 이유야.”

“그래서 어짜피 푸른은 존속할 테니까 죽이지 말아달라, 이런 거야?”

“아니, 그래 말의 의도를 명확히 하지. 난 너한테도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고 말하는 거야.

너는 변화를 겪어서 이렇게 됐지.

그래서 너는 지금 안정을 원하고 있어.

그리고 그 안정을, 지금 푸른이 가지고 있다고. 아직 늦지 않았어. 변화에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안정을 제공하는 곳이야.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이 모두를 포용할 준비가 되어있어. 근데 네가 여기서 날 죽이면 그 재생의 기회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거야. 물론 바로 기회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생각을 잘 해보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최종민이 말했다.

“당장에 최한울도 너랑 똑같아. 눈앞에 주어진 안정이 얼마나 소중한 건 줄도 모르고 변화하려 하니까. 물론 이게 푸른의 사상이라는 건 아니야. 그냥 불쌍해서 하는 말이지.”

 

“조용히 해”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최종민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달이 하나인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나?” 그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도 깊은 검은색이 있었다. 어머니나 서현이의 검은색보다는 그을음의 어둠에 더 가까운 빛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심연이 그녀를 응시하자, 한 번 더 그녀 안에서 무엇인가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됐다.

 

그녀가 사무실에서 나와 화장실로 향하자, 인위적인 청록색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어둠을 밝혔다. 그녀는 세면대로 달려가 수도꼭지를 돌리고 팔과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최종민의 목에 칼을 꽂고 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쥐도록 한 몇십 초 전의 이미지가 눈앞에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다. 얼굴 오른쪽에 남아있는 핏자국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 청록색 조명 아래에서 붉은색의 피는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다. 그녀는 오른팔과 얼굴을 물로 더 세게 문질렀다.

옷에 묻은 피는 당장에는 지울 수 없을 것 같아 입고 온 겉옷을 잘 그러모아 가렸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상가 계단을 내려가 장소를 벗어났다. 거칠게 숨을 쉬며 서현의 집으로 뛰어가다시피 걸어갔다. 이상하게 어지럽고 귓속에서 울리는 알 수 없는 소리들로 머릿속은 시끄러웠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야, 너 여기서 뭐해?”

“서현아.”

 

 

20

 

그 목소리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공명했다.

 

그렇게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녀가 정신을 진정시킬 때까지 절차의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자신을 정해진 집으로 이동시켜 줄 차량에 타 있었다. 차 안에서는 존 덴버의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그 노래는 아팠던 기억을 잊게 해주는 힘이 있다. 행복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로 새출발을 해 원하는 만큼 여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노래다. 창밖에 펼쳐진 끝없는 논을 보면서, 그녀는 희망이 들려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곤히 잠 들었다.

 

도착한 목제 집은 정말이지 기묘하고도 신비한 장소였다. 클레식한 목제 가구들이 두 층을 가득 채웠다. 현관에서 일자로 나아가면 나오는 널찍한 거실의 한쪽 면은 여닫을 수 있는 큰 유리창으로 되어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밭 위에서 서서히 지는 노을이 보였다. 진한 주황색 광선이 공간을 채우고, 눈으로 태양을 직접 마주하기가 힘든, 강력한 노을이었다. 그 공간을 가득 메운 깊디깊은 고요를 뚫고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 ‘혼자’라는 단어는 외로움보다 평화에 더 가까운 의미였다. 창문을 조금 열자, 그 틈으로 기어들어 온 저녁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2층에서 침실 안의 흰 침대 위에 앉아 바깥에 놓고 온 것들을 생각했다. 직장과 취미,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 그 모든 것들이 오래된 백열전구의 불빛처럼 팟 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커튼을 쳐 놓아 암흑이 형성된 그 방에서, 그녀는 여러 과거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공기를 들이쉴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존재하는가. 과거 혹은 현재. 저기 혹은 여기. 그녀는 어둠을 밝히는 고장난 영사기가 되어 계속해서 물었다. 그리고 답을 점차 찾아갔다. 과거의 순간들이 하나둘씩 기억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말했지만 그 노래는, 그녀의 기억을 꼼꼼히 지워갔다.

 

사실 그 기억을 영원히 간직해야 할 필요도 없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것들은 과거의 유산으로 기억 속에서만 존속할 뿐 그 실체를 접할 수 없다. 이미 모든 게 사라지고 아무것도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된 세상이다. 그렇지 않은 하나가 있었지만 괜찮았다.

안정을 위한 희생이란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그녀는 인생의 뒷꽁무니를 계속해서 뜯어갔다. 어느샌가 뒤를 돌아봤을 땐 얇고 희미한 기억의 실 몇 가닥이 살랑거리면서 녹아 없어지는 모습만이 보였다. 그녀의 과거는 모을 수 없는 기체로 산산이 승화되어 공기 중을 떠돌았다.

 

두 집 건너편에 있는 노부인을 찾아가 보라는 우편이 왔다. 그날도 첫날처럼 노을의 주황색 광선이 그녀를 비추었다. 그녀는 잘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질러 걸었지만, 자동차는 단 한 대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연속된 집들이 주욱 깔려있는 그 공간을 횡단할 때면,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미세한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녀는 아래를 바라보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질문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 집 앞으로 다가가자 존 덴버의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의 멜로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21
그리고
22

 

“진짜 미안, 그 회사에서 갑자기 회식이 생겼는데 분위기가 진짜... 연락을 볼 수가 없었어. 진짜로 미안. 여긴 무슨 일이야? 걱정했어?”

“아... 난 그냥 너가 계속 안 돌아와서...” 그녀는 말하면서 팔 힘이 풀렸다.

“야, 너 그거 뭐야? 피야? 너 뭐 한 거야?”

“난 그냥 네가...” 그녀는 가만히 서현을 바라보고 말했다.

“너, 하... 내가 미안해.” 서현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일단 우리 집으로 빨리 가자. 그런 다음에 생각해.”

집에 도착한 그녀는 겉옷을 의자에 걸고 서현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서현은 하늘색 셔츠와 검은색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헝클어진 긴 생머리에서 몇 가닥의 잔머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당황한 표정과 경직된 자세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있는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의 움직이는 시선이 서현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고된 눈이다. 힘들고 피로하지만, 놀란 채로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눈동자는 이전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깊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시선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지만 항상 닿지 못하고 바로 앞에서 휘어졌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계속해서 멀어졌다.

그녀는 서현의 눈빛과 힘없이 늘어진 집안의 공기와 축축하게 젖어버린 상의를 걸친 자신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바닥에 주저 앉은 채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내려는 듯이 소리를 토해냈다.

지금 여기는 내가 운 세계. 달은 하나 그리고 둘.

 

처음 몇 분 동안은 이서현의 품속에서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흘러나오는 눈물 사이에서 숨을 쉬려 헐떡였을 뿐이었다. 서현이도 가만히,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자신의 셔츠를 흠뻑 적실 동안 잠자코 기다렸다. 고통스레 흐느끼는 소리를 그냥 들어주고 있었다. 눈물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그녀는 서현과 자신 사이, 그 좁은 틈에서 습하고 따뜻한 공기로 천천히 호흡했다. 그녀에겐 그것이 이때 집안의 공기였다.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고, 그녀는 서현의 어깨에 기댔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와 서현의 어깨 사이에서 엉겨 붙어 있는 둘의 머리카락을 뒤로 치웠다. 피부와 서현의 셔츠가 맞닿게 한 뒤에 옅은 숨을 내쉬었다.

“서현아.”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서현의 귀를 향해 말했다.

서현의 귓바퀴는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워 보였다.

 

사실 고등학생 시절의 이서현이 그녀를 제외한 친한 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2학년이 되고 난 후 서현이 만들었던 여러 친구 중 이현서라는 이름을 가진 옆 반의 단발머리 여학생과 좀 오래 가는 듯 보였다. 현서도 그녀처럼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는 서현이를 익숙해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서현이는 그녀 못지않게 현서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여전히 서현의 친한 친구가 두 명뿐이라는 사실을 의아해했지만 새로운 친구를 만들었으니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그 둘의 조합을 ‘현서현’ 혹은 ‘서현서’라고 불렀다.

서현은 2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토요일, 현서가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찾아왔다고 말했다. 토요일 아침, 서현의 부모님은 집에 없었고 남동생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그 둘은 아직 서로의 집에 찾아가 본 적이 없었지만 평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을 느낀 서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현서를 집으로 들였다. 현서는 소파에 앉더니 울먹이면서 자신의 남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서현은 그녀의 남자 친구를 이전에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작년 여름 방학부터 만나기 시작한 그는, 따뜻한 얼굴에 착하고 현서의 얼굴을 보면서 웃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셋이 함께 모이는 화기애애한 자리에 서현은 가끔 그녀를 초대하기도 했다.

현서는 서현에게 어젯밤 남자 친구와 끝까지 해버렸다고 이야기했다. 평소처럼 금요일 밤 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일이 갑자기 그렇게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현서는 그 일이 싫었거나 그 일 때문에 남자 친구를 원망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충분히’의 기준 또한 남자 친구의 그것과는 달랐다. 현서는 그 일 이후에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서현은 인생의 모든 일이 바라는 데로만 흘러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 과정에서 나아가는 변화를 위한 희생이란 감수해야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희생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말을 바꿨다.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 아침, 현서는 교회를 가지 않고 집에서 투신했다. 서현이 말했듯이, 인생의 모든 일이 바라는 데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서현은 월요일 학교가 끝나고 그녀의 집에 찾아가 품에 안겨 울었다. 지금의 그녀처럼 처참하고 아프게 울지는 않았지만, 더욱 깊게 흐느꼈다. 그녀는 서현의 몸에서 이는 파동과 미세한 떨림 하나하나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주 뒤의 수학여행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특별한 것을 교환했다. 그 둘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주었고, 상대방의 소중한 것을 받았다.

 

그녀가 한울이의 연락을 받은 대학교 2학년의 그날, 서현의 남동생은 기숙사 고등학교에서 첫 학기를 마치기 몇 주 전에 자살했다.

서현의 남동생은 죽기 전 자신의 방 책상 위에 짧은 유서를 남겨 두었다. 그가 평소 쓰던 연한 노란빛의 노트 한 장을 뜯어 검은색 볼펜으로 글을 쓴 뒤 2번 접었다. 그 종이 조각 위에는 ‘엄마, 아빠, 누나, 친구들에게’라 쓰여있었다. 투박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은 펼쳐지지도 않고 책상 위에 혼자 놓여 있었다.

 

지금 이 방에는 내 룸메가 없어. 그래서 이걸 쓰고 있는 거야. 있었다면 분명 뭐하냐고 물어봤을 테니까. 난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난 분명 이런 걸 바라고 이 학교에 온 게 아니야. 여기에 있는 건 너무 힘들어. 학교의 시스템이나 주변의 친구들 때문에 힘들다는 건 아니야. 이건 그냥 완전히 내 안에 있는 문제 때문이야. 가끔씩 책상에 앉아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참을 수 없이 외로워지기도 해. 집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계속 생활한다는 생각 때문일 때도 있지만 그게 주된 원인은 아닐 거야.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내가 뭘 하러 여기에 왔는지 모르는 거야. 그래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지.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상한 기분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거야. 여기서 이런 생각 하면서 우울해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겠지.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이 기분이 너무 무서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럴까 봐 무서웠어. 왜 나한테만 이 기분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은 걸까. 이렇게 사람들이랑 달라서, 나만 계속 이상해지는 것 같아. 엄마나 친구들, 선생님들한테 말해 볼까 계속 고민했어. 그런데 그냥 그런 게 다 너무 무서워. 난 이런 걸 잘 견디는 사람이 아니야. 그냥, 혼자가 된 것 같으면서도 바뀔 수가 없는 거야. 난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무도 미안해할 필요 없어. 말했지만, 이건 누가 잘못한 게 아니라 완전히 내 문제니까 내가 미안해야지. 엄마랑 아빠랑 누나랑 친구들, 전부 날 사랑해 주었는데 정말 미안해. 그런데 진짜로 어쩔 수 없었어. 난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학교에서 하지 못한 공부랑 쓰지 못한 글이랑 보지 못한 책이 너무 많아. 그리고 가족들이 다 있는 집에서 엄마한테 안겨보고 싶어. 그런데 이건 사실 아무 의미도 없어. 나는 이미 여기서 너무 변해버렸어. 마지막으로 집에 왔을 때 나 분위기 좀 이상한 거 눈치 못 챘어? 그렇다고 해서 미안해하지 마. 이 말을 한다고 슬프지 않아 할 건 아니겠지만.
이게 정말 모든 것의 끝이라면, 난 무엇이든지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어.

 

그땐 그녀가 먼 곳에 있는 서현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상의를 서현의 눈물로 적셨다.

서현은 다시 한번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울었다.

그들도 지켜주지 못할 서현에 대해 울며 죽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서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최한울의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 일어난 일들을 계속해서 말했다. 버스에서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는 이야기, 하은이가 죽은 이야기, 어머니가 죽은 이야기, 양정산을 죽인 이야기, 직원을 죽인 이야기, 최종민을 죽인 이야기.

“책에서 1Q84년엔 달이 두 개인 거 알아? 그래서 나도 내가 있는 곳에는 달이 두 개 떠 있는 줄 알았어. 고개를 들었을 때 똑같은 모양의 달 두 개가 나란히 떠 있는 걸 발견하는 거지. 그런데 내가 달을 보았을 때는 그러지 못했어. 항상 무언가 때문에 확인할 수 없었어. 그 무언가가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알 수 없게 하고 있다고. 도대체 여긴 어디야? 지금 하늘에는 달이 몇 개야?”

서현은 그녀를 발코니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란히 앉아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았다. 외로운 달은 혼자서 밤하늘 어딘가에 걸렸다. 왼쪽 아래로 기운 두꺼운 편의 그믐달이었다. 작은 조각 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달빛에도 눈이 부셔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번 나눠서 보아도 달은 하나였다. 언제나와 같이 고독하게 떠오른 채 영문도 모르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신이 언젠간 이 자리에 놓이게 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와보니 지금이 그 순간이란 걸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달은 그녀에게 계속해서 어떤 의미를 전달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전혀 해독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왔다는 느낌만이 들었다. 달빛의 광선은 그녀의 피부를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를 빠르게 훑었고, 그 사이에 무엇인가를 남겼다. 차가운 산들바람을 앞면으로 맞이하면서 주위로 흩어지게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바람은 불지 않았고 공기는 따뜻했다.

그녀는 서현의 오른편에서 왼팔을 붙잡고 있었다. 자신 쪽으로 끌고 와 오른팔을 팔짱 끼고 다른 팔로는 손으로 감싸 걸었다. 불지 않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으려는 듯이, 힘주어 안아주고 있었다. 이때는 팔을 붙잡힌 서현이 그녀에게 기댔다. 시선을 오른쪽 아래로 내리면 자신을 향하는 서현의 정수리를 볼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와 다른 것 없이, 길고 검은색을 강하게 띠는 머리카락의 얇은 줄기 여러 개가 아래로 뻗어있었다. 서현이 자세를 고쳐 앉을 때면, 머리카락끼리 비벼지면서 나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또 움직이는 머리카락이 목과 어깨와 상체를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촉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그런 소리와 촉감이 먼 곳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멀리서 어떤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고 몇 초 뒤 그것을 진짜로 느끼듯이, 서현의 움직임과 그녀의 감각 사이에는 조금의 시간 차가 있었다.

어두운 밤, 친구의 집에서 달빛을 맞고 있으면, 그렇게 아득해진다.

 

둘은 차례대로 씻고 그녀가 어젯밤 얕은 잠에 들었던 침대 위에 함께 누웠다. 침실에서는 별다른 색을 가진 빛없이 검은 어둠만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7월 초의 그것과 똑같았다. 서현과 그녀는 한 이불 아래에서 두 개의 베개를 베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특별한 공기가 드리웠다. 어둡고 밀도가 낮지만 그 속에서 숨 쉬는 사람들에게 포근함과 따뜻함을 전해주는 공기였다. 이상하게도 그때처럼 자연 냄새가 났다. 아니, 그때도 지금도 공기에 은은하게 남아있던 그 냄새는 자연의 냄새가 아니었다, 고 그녀는 깨달았다. 서현이 바로 앞에서 바라봐줄 때만 나는 좋은 냄새였다. 그 향기를 나게 하는 입자들은 둘의 시선이 맞닿는 허공에서 자연히 만들어졌다.

모든 감각이 먹먹해질 정도로 어딘가 멀리 다녀왔던 그녀는, 그 시선 앞에서 다시 한번 가까움과 명확함을 느꼈다. 조그맣게 한 점으로 빛나는 서현의 안광과 입가에 잔여물처럼 희미하게 남은 미소를 느꼈다. 바로 앞의 서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의 서현과 그때의 서현을 계속해서 겹쳐보았다. 그때보다 지금의 머리카락이 더 길다. 그때보다 지금의 눈이 더 슬프고 피곤하다. 그러나 더 깊고 넉넉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차이는 바로 지금의 서현은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베개 하나를 들고 방을 걸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다가 잠들더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떠나지 않은 채 변치 않는 애정을 전달할 것이다.

서현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왼쪽 뺨에 얹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듯이 천천히 문질렀다. 보들보들하고 따듯한 손길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잠시 서현은 후에 숨을 내쉬고 팔을 뺀 뒤 눈을 감았다. 서현의 숨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볼에는 서현의 손가락의 온도와 감촉이 남긴 잔상 같은 느낌이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얼굴의 솜털을 쓸고 지나간 손가락이 남긴 흔적을 계속해서 되새겼다. 그 움직임을 그녀의 머릿속에서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녀는 동시에 자기 자신 속에서 알 수 없는 공허를 마주했다. 모든 것을 방해하고, 지우고, 허무하게 할, 불쾌한 검은 빛이다. 그리고 그 어둠은 청록색 조명을 받는 최종민의 피처럼, 질척한 광택을 띠었다. 그것은 그녀 안에서 곧 있으면 넘쳐흐를 것처럼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예상을 하고도 대응할 수 없는 홍수가 발생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처럼, 어딘가에서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선택하고 결심하고 행동해야 할 때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상황 속에서 서현과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방해가 되는 대상이 무엇이든지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됐다.

“서현아.”

“응” 서현은 옅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끝까지 해야 할 것 같아. 푸른을. 그게 아무 의미 없는 거더라도.”

서현은 눈을 뜨고 그녀를 조용히 보았다. 서현의 숨소리만이 존재하는 둘 사이의 침묵을 깨고 그녀가 말했다.

“이게 정말 모든 것의 끝이라면, 난 무엇이든지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어.”

서현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리듬이 잠시 흐트러졌다. 떨리는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현은 심호흡을 하고 다시 팔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손을 감았다. 이번엔 손을 빼내지 않았다. 그녀와 온도를 나누면서 눈을 감고, 계속해서 숨을 쉬었다.

 

잠에서 일찍 깨어난 그녀는 전신에 조금씩 묻어있는 땀과 함께 흐린 날의 새벽을 맞았다. 침실 창문을 가린 커튼 틈새로 구름이 반사해 낸 은은한 회색의 햇빛이 들어왔다. 형광등의 빛과는 다른, 순수하다 할 수 있는 하얀빛이 바로 보였다. 깊고 자연스러운 잠에서 깨어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창문을 행해 걸어간 뒤 커튼을 들춰 바깥을 보았다.

모든 것을 비추는 해의 강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구름에 가려 하늘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태양이 없는 하늘 아래, 옅은 안개가 드리우고, 곧이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조금 멀리 있는 건물은 안개에 가려 형체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마 그곳에서도 서현의 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안개 때문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안개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두를 단번에 고립시켰다.

 

그녀는 ‘푸른’이 소유한 농장의 위치를 찾았다. 대규모 농업 기업의 농장 위치를 인터넷에서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는 차표를 구했다.

그녀는 이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나서 살아갈 자신의 미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꼭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은 가질 수 없었다.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계속해서 아직 자고 있는 서현을 바라보았다. 어젯밤과 같은 리듬으로 숨 쉬고 있었다. 몸은 비어 있는 침대의 오른편을 향하고, 오른손은 그녀의 배게 위에 얹혀있었다. 이따금씩 손가락을 움직여 베개를 조금 구겼다. 서현의 감긴 눈을 밝은 곳에서 다시 보니, 새로운 온기가 느껴졌다.

옷을 전부 갈아입은 그녀는 허리를 숙여 오른손을 베개 위 서현의 손 위에 살포시 얹었다. 그 부드러운 손을 맞잡은 채로 허리를 더 깊숙이 넣어 얼굴을 서현의 귀까지 가져다 댔다. 그 부들부들한 귀는 산들바람 속 현수막이 살랑거리듯이, 서현의 호흡에 맞춰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잘 자.”

라고 말하고는 웃으면서 침실을 떠났다. “다시 돌아올게.”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주방에서 물티슈와 비닐장갑 한 쌍을 챙겼다. 이 둘을 한데 뭉쳐 작은 갈색 크로스백에 넣은 뒤 집을 나섰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주변으로 크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땐 안개가 계속해서 쌓이다가 서로 뭉쳐져서 질량을 못 이기고 떨어지듯이,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차에 타고 나선 창문에 뚝뚝하고 부딪히는 빗방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빗방울은 창문에 충돌하며 자신의 일부를 자국이자 흔적으로 그곳에 남겨 두었다. 창문에 붙은 물방울들의 그림자 때문에, 기차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점박이 무늬를 가지게 되었다. 구름이 가득 차 있는 하늘의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은 객실 바닥을 불규칙하게 칠했다.

기차가 빠르게 가속할 때, 동시에 앞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물방울들은 창문 위에서 완만한 사선을 그리며 미끄러졌다. 모든 물의 조각이 일정한 기울기를 공유하며 천천히 이동했고, 창문에 자취를 남겼다. 자로 대고 그은 듯, 정렬된 선분들의 배치는 사람의 이목을 끄는 아름다움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 사람을 죽이고 나면 서현이에게 돌아가 그 품에 안길 것이다. 양팔로 꼭 끌어안고 몸을 밀착시켜 서로의 옷이 비벼지게 할 것이다. 둘이 지금 당장 서로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어깨 위에서 목 옆부분에 밀착하고 있는 머리를 옮겨 이마를 맞댈 것이다. 허리를 둘러싸고 있는 팔을 들어 올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다. 그 상태로 숨을 강하게 한 번 내쉬면서 서로를 느낀다. 이때가 되면 그녀가 눈물을 흘려서, 서현이가 엄지손가락으로 쓰윽 닦아내 줄 수도 있다. 그 손길은 그녀의 눈꺼풀 위를 쓸고 지나가면서 촉촉하게 젖는다. 서현도 그녀처럼 상대의 얼굴을 두 손바닥 사이에 두었을 때, 그녀는 그 물기가 자신의 볼에 닿는 것을 느낀다. 또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부드러움을 느낀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칼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기차에서 내렸을 땐 구름이 걷히고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의 작은 자갈 틈새까지 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주변 집들의 지붕에선 여전히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빨간 벽돌을 쌓거나 베이지색의 콘크리트를 타공해 지은 듯한 일반적인 농촌의 집이었다. 낮은 흰색 담장으로 작은 앞마당을 둘러싼, 그런 종류의 평화로운 집들만이 있었다. 군데군데 작은 논이나 텃밭이 자리잡고있는 광경을 사방에서 볼 수 있었다.

한 집의 담장 바로 앞에서 그녀는 칼 한 자루를 발견했다. 그녀와 서현이 쓰던 것과 같은, 좋은 소재로 만들어진 칼이었다. 그러나 버려진 물건답게 여기저기 흠집과 검은 얼룩이 보였다. 게다가 빗물을 타고 어디선가 흘러온 희뿌연 색을 띠는 오염물질로 젖어있었다. 손잡이를 이루는 검은 플라스틱은 왠지 모르게 칼 몸과 제대로 연결되지 못한 채로 헐렁거렸다. 그녀가 그 칼을 천천히 집어 올리자, 아스팔트 도로와 칼의 끝부분이 긁히는 소리가 소름 돋게 났다. 그녀는 칼을 한 번 휘둘러 검은색 물방울들을 떨쳐냈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닦아내 표면에 남은 물기를 제거했다. 그러자 좀 오래되었을 뿐, 정상적인 좋은 칼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녀는 그 칼을 작은 갈색 크로스백 안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푸른’은 정말로 기묘한 장소였다. 어디서부터가 ‘푸른’의 시작이라고 표시하는 경계나 안내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점진적으로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 나가면서, 정신을 차리고 보았을 땐 완전히 색다른 장소에 놓여 있게 되는 일이 많았다. 언덕 위에 놓인 논이 끝도 없이 펼쳐지기도 하고, 으스스할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는 건물들이 쭉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한 변화는 시시각각 일어나지만, 이상하게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장소들은 과할 정도의 정적과 평화를 품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무섭게 했다.

그녀는 어느샌가 길의 끝인 해안선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두터운 구름으로 하늘은 묵직하고 어두운 푸른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하늘의 빛을 반사하는 바다 또한 짙은 파란색을 띠었다. 수평선에서부터 불어오는 거센 바닷바람으로 남색의 바닷물 위에선 높게 너울이 일었다.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서로 뒤섞인 채 웅장하고 넓게 울렸다. 그 바람을 견디고 하나의 흰색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조개와 소라의 껍질을 모티브로 지어진 듯이 현대적이고 매끈한 곡선이 눈에 띄었다. 그 건물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들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휘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밝은 흰색의 무거운 현관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천천히 닫히자, 바람이나 파도 소리가 사라지고 고요가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완벽하게 통제된 고요였지만 과도한 조용함 특유의 불쾌함은 없었다. 평화롭게 가라앉아 있는, 방과후 노을 속 빈 교실의 공기였다. 여름엔 시원함이, 겨울엔 따뜻함이 적당히 남아있는, 학생이란 하나도 없는 학교 교실 말이다. 조심스레 들어서서 빈 책상 하나를 괜히 만져 볼 때 나는 그 스윽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신비한 공기가 생각났다. 그 바닥과 벽의 재질과 고요의 공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종류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가장 높은 층인 6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직감이 그녀를 그곳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정확히 그 건물에 그 층, 그녀에게 모든 것을 끝내게 해줄 그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또한 최종민처럼 언제나 바꿔 낄 수 있는 직원일 수도 있지만, 분명 그와는 다를 것이다. 그 사람을 죽이고 나면 그 이후에 죽여야 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게 된다는 차이점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이를 모든 것의 끝으로 만들어 주었다.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동시에 직감은 섬뜩한 의견도 냈다. ‘푸른’이라는 시스템은 그녀의 살인과는 아무 관계 없이 계속해서 굴러갈 것이다. 존속을 향한 그 강력한 운동에, 개인의 저항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시스템 안에서 같이 회전하는 직원들의 존재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선과 악을 대표하는 주체로서의 존재 의미가 아닌 시스템의 동작을 위해 필요한 부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멈추지 않는 거대한 흐름 속에 휘말려버렸을 뿐인, 그저 한명 한명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들을 찌르며 무언가를 지켜낸다고 믿는다.

그녀는 이 생각을 최대한 빠르게 잊으려 노력했다. 앞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딴생각은 옳지 않다.

 

6층에는 하나의 방만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는 다시 한번, 흰색 문이 놓여 있었다. 그 하나의 문은 현관문보다 더 가볍고 쉽게 열렸다.

문을 열자 저 멀리 방 반대편에 놓인 큰 책상이 보였다. 책상 앞의 검은색 가죽 회전의자 위에는 한 늙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검은색에 갈색이 조금 보이는 풍부한 머리카락을 레이어드 밥으로 꾸미고 선명한 파란색 정장을 차려입었다. 늘어진 피부 사이로 턱뼈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마른 편이었지만 힘없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더니 늙고 왜소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걸어왔다. 그녀는 영롱한 파란빛의 흔들리는 잔상과 여인의 입가에 걸린 환한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비닐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작은 크로스백 안에 들어있는 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안녕하세요.” 여인이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그녀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인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늙은 여인의 얼굴에는 자잘한 주름이 규칙적으로 걸려 있었다. 여인의 피부에는 구겨진 천 조각 같은 질감에도 잃지 않은 생기가 충만하게 담겨있었다. 그녀는 칼을 꺼내 여인의 왼쪽 가슴에 찔러넣었다.

그리고 바로 뺐다.

늙은 여인은 피를 쏟아내며 순식간에 뒤로 쓰러졌다. 여인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는 파란색 정장을 검게 물들였다. 여인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 뒤로 쭈욱 하고 피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 여인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입에선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로 주저앉아 여인의 몸통을 양팔로 받혔다. 칼이 그녀의 손을 떠나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그녀는 여인의 피부가 미세하게 창백해지는 과정을 보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여인의 등에 있는 관통당한 구멍을 막았다. 그녀는 비닐장갑을 착용하지 않은 왼손이 여인의 따뜻한 피로 적셔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어떻게 변화한 것인가. 그러나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답도 얻을 수 없었다. 좁고 어둡고 축축한 방에 갇혀 이리저리 뛰어다녀 봤지만 계속해서 벽에 튕겨 나갈 뿐이었다. 이상한 장소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다. 그 순간 그녀를 둘러싼 물질과 공기와 사람은 온통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아득해지기만 하는 그 공간에 앉아버린 그녀는 어지럽기만 했다.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우리가.” 여인은 죽어가며 말했다.

그리고 내 왼손은 여인의 등 뒤에서 그 피로 적셔지고 있었다.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우리가.”

그 목소리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공명했다.

 

 

 

 

 

 

 

 

 

 














End



















작품 전체를 다 읽고 주제에 관해 생각해 본 독자들을 위한 작가의 의도를 소개하는 시간이다. 먼저 작가의 의도는 다른 독자들의 것들보다 더 자세하기만 할 뿐 근본적으로 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저 또 다른 독자의 의견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작품을 읽은 모두가 각자만의 의미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1.

먼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인 '두 개의 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가장 재미있는 요소부터 소개하자면, 해당 메타포를 통해 소설에 숨겨진 하나의 반전을 상정할 수 있다. 바로 소설의 어느 시점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모두 주인공 '그녀'의 망상이자 만들어진, 혹은 왜곡된 세계라는 것이다. 그 경계는 [1Q84]에 대해 이야기 하는 순간, 하은이의 죽음 등으로 볼 수 있으나 작가의 의도는 1부의 끝에 가장 큰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둘 모두 가능한 경우이고 특히 전자의 경우 문학적인 해석의 가능성이 더욱 폭 넓게 펼쳐진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지만 1부의 마지막 구절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은 마음이다.

이게 너가 쓴 소설이라면, 생각으로만 만들어낸 이야기라면, 지금 당장 달을 두 개로 만들어줘.
내가 확신할 수 있게.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이 말을 하고 난 뒤 그녀는 자신의 하늘에 몇 개의 달이 떠 있는지 확답할 수 없었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이 현실이 아님을 보여달라 말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줄에서 그 대상을 자기 자신이라 소개한다. 그러나 이 '자기 자신'이 말 그대로 본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속으로 읊조린 것, 즉 자신의 인식 체계 그 자체나 내면적인 대상 혹은 영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누군가를 뜻할 수도 있다. 먼저 후자의 경우 그 존재는 이 모든 상황을 설계하고 조종해나가는, 현실에 대입해 보면 신에 해당하는, 창조주나 작가이다. 그리고 이 장치는 아래 구절과 함께 주인공이 놓인 상황을 '새로운 세계'에서 '한 작가의 소설'로 천천히 바꿔나가는 역할을 한다.

주인공이 옮겨 간 세상에서는 달이 두 개다. 책의 뒤쪽 덧표지에는 ‘당신의 하늘에는 몇 개의 달이 떠 있습니까?’라 쓰여있었다. (중략) 달이 한 개인지 두 개인지는 판별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달이 두 개가 되는 것은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니라, 고 생각했다.

이러한 해석과 위 구절이 [1Q84]와 [우리들]이 '두 개의 달' 메타포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전자는 두 개의 달을 엄연한 당장의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그 앞에 놓인 존재의 혼란을 조명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해당 메타포를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설정' 같은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는 곧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자 이정표가 되어, 끝까지 본 모습을 밝히지 않는다.
또 소설 속 인물인 '그녀'가 자기 자신을 실제로 소설 속 인물로 빗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사건들에 둘러싸여 위안을 얻으려는 정신적 시도 같기도, 진짜로 바깥 세상을 내다보며 독자에게 던지는 '당신의 세계는 진짜 현실인가?'라는 질문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라면 (1부의 마지막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소설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암시가 될 수 있다. 소설 전반에 걸쳐 서술된 여러 이야기들, 특히 2부의 이야기가 현실인지 아닌지의 경계를 흐린다. '그녀'의 내면과 느낌에만 밀착된 서술로 진위성이 분명히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자들을 더욱 깊은 혼란으로 빠트리는 장치이다. 이때는 2부에서의 행동과 '푸른'의 존재 자체를 그녀의 망상이나 왜곡된 인식으로 만들어 그 비현실성과 미묘함 뒤틀림을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결말과 짝수 장의 진짜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예를 들어 푸른 정장 남자를 일종의 의사 혹은 망상증 환자 치료 센터의 대표와 같은 존재로, 짝수 장에서의 그녀를 농촌에서 요양 치료를 받는 환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이때 '아저씨' 시스템과 '푸른'의 전체적인 운영이 어떤 것을 상징하는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소설은 이 많은 가능성을 토대로 현실, 만들어진 이야기, 그리고 망상 사이를 자유자제로 이동하며 한 존재의 세상 인식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제공한다.

2.

소설의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소설을 계획하고 집필하는 단계에서 '사람과 주변의 변화'가 이야기의 가장 주된 테마로 상정하였다. '두 개의 달'로 대표되는 현실과 망상 사이의 흐릿한 경계, 그리고 불안은 변화를 겪는 한 사람이 흔들리는 과정의 일종이다. 소설의 구심력을 위해 게속해서 삽입될 정도로 서사 내적인 중요도가 높을 뿐이지, 그것이 이야기 전체가 말하려는 주제 그 자체는 아니라는 뜻이다. 가장 처음에 생각해낸 플롯이 '주변에서의 갑작스런 사건으로 한 여성에게 변화가 일어난다'라는 이야기였다. '사람의 변화'라는 주제가 작가 본인의 신조 중 하나이기도 하고 소설 [1Q84]에서 찾아온 아이디어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하나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르칠 일을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남는다. 와인병 바닥에 남은 침전물같이.


-[1Q84: BOOK1]

소설을 시작하고 진행해나갈 때 가장 큰 아이디어와 작성의 동력이 된 [1Q84]의 한 구절이다. 이 문장이 전체 소설의 주제를 대표한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단순한 문장이 내비치는 예상 못할 거대한 철학적 질문이 보이기 때문인지 BOOK1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말한 듯 출품한 소설의 주제가 '한 여성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으며 자신도 변화한다' 이다. 여담으로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과 다르게 주인공의 이름만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그러한 변화들은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복선이자 주제적 의도의 일부이다.

새로 쓴 2부에서 해당 주제가 더 구체화되었다. 최종민이 '그녀'와의 대화에서 안정에 대해 직접 말하는 부분이 가장 눈에 띌 것이다. 우선은 20장과 21그리고22 장에서 대비되어 나타나는 두 구절을 살펴보자.

이미 모든 게 사라지고 아무것도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된 세상이다. 그렇지 않은 하나가 있었지만 괜찮았다.
안정을 위한 희생이란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그녀는 인생의 뒷꽁무니를 계속해서 뜯어갔다. 어느샌가 뒤를 돌아봤을 땐 얇고 희미한 기억의 실 몇 가닥이 살랑거리면서 녹아 없어지는 모습만이 보였다.
- 20

서현은 인생의 모든 일이 바라는 데로만 흘러가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 과정에서 나아가는 변화를 위한 희생이란 감수해야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희생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말을 바꿨다.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 아침, 현서는 교회를 가지 않고 집에서 투신했다. 서현이 말했듯이, 인생의 모든 일이 바라는 데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 21그리고22

두 구절은 각각 푸른에 새로 도착한 짝수 장의 그녀와 현서를 위로하는 과거의 서현의 입에서 흘러나와 서로를 병치시킨다. '희생을 감수할 만큼 필요한 것'을 20장에선 안정으로, 21그리고22 장에선 변화라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변화를 배척하는 푸른과 안정을 배척하는 현셀세계의 구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들은 안정과 변화 그 무엇도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20장의 그녀는 '그렇지 않은 하나'를 잊는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안정이라는 개념에 희생을 덧붙인다. 그리고 서현의 '변화를 위한 희생'이라는 말은 현서가 자살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대비와 개념에 덮어씌운 암울한 공기를 통해서 한 사람이 삶이 변화와 안정 사이에 놓인 채로 비극을 탈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변화를 택하든, 안정을 택하든 환경에 둘러싸여 겪는 비극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주제 또한 있다는 뜻이다.

3.

수많은 장면과 회상을 연출하는 데에 있어 [1Q84]의 영향을 받았다. 아래에 작가가 기억나는 부분들을 정리해본다.

우선 주인공의 설정부터 [1Q84]의 주인공과 유사하다. 수학 학원 강사인 동시에 소설을 쓴다는 설정은 덴고와 일치한다. 작가 자신과의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했기에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한다.

19장에 등장하는 서현과의 수학여행 날 밤 회상은 BOOK1 극초반부 아오마메의 회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성하였다. 책에서 아오마메는 절친 다마키와 떠난 여름 방학 여행에서 불이 꺼진 침실의 이불 속, 서로를 마주보고 누워있었다. 다만 아오마메의 경우가 작가의 소설에 쓰인 내용보다 훨씬 더 수위가 높다는 차이점이 있다. [우리들]에선 그냥 마주보다가 간지럽힌 후 떠나지만, [1Q84]에서 둘은 완전한 나체로 누워 서로의 몸을 쓰다듬는다. 서로의 클리토리스와 음모가 다름을 느낀다는 묘사도 등장한다. 작가의 경우, 이 정도 수위의 표현을 함에 있어 잘못되거나 지나치게 극단적인 묘사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가장 먼저 앞섰다. 또한 육체적이거나 성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여 순수하고 오묘한 사랑의 형태를 담아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와 서현이 동성애자인 것이냐는 의문, 혹은 확신에 찬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한 이후부터 분위기 형성과 이야기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그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여성으로 구축하게 된 경향이 약하게 나마 존재한다. 따라서 그 둘의 동성애자 구도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더라도, 그녀와 서현 사이의 사랑을 의도하고 작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앞서 말했듯이 두 인물의 성적 지향을 동성애로 두는 것이라기 보단, '이 둘 사이에 우정 이상의 어떤 것이 피어났었고, 그 관계는 단순한 친구 사이라 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라는 느낌을 전달하여 서현이라는 인물에 차별점을 부여하는 것 뿐이다. 물론 [1Q84]의 경우처럼 아오마메를 동성애자로 볼 수 없도록 다른 요소들을 투입하는 것을 모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실행하기에는 시간과 작가로서의 내공이 부족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어느 방향으로든 성적으로 깊게 들어갈 생각으로 소설을 쓰지 않았다.

19장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그녀'와 최종민의 대화 장면은 BOOK2의 중반부 , 아오마메와 선구의 리더인 후카다의 대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사실 푸른이라는 단체의 설정이나 분위기 자체가 [1Q84]의 선구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다. 선구는 농업 코뮌으로 시작했으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 폐쇄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다시 장면으로 돌아와, 적대적인 단체의 리더를 처리하기 위해 온 여자인 '그녀', (사실 최종민을 죽이기로 완전히 마음을 굳힌 후 푸른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서현의 죽음에 대해 마치 '일처리'처럼 논하는 최종민의 모습과 태도를 보고 충동적으로 직원을 살해한 것에 가깝다. 물론 언젠가는 직원과 최종민을 죽이고 자리를 떴을 것이다.) 그 여자 앞에서 담담하게 말하는 덩치 큰 남자인 최종민의 구도가 일치한다. 그리고 최종민이 어떠한 종류의 선택지를 제공하고(자신을 죽이는 것이 그녀에게 좋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죽이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최대한 그가 선택을 그녀에게 넘기는 분위기를 풍기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결국 죽이는 것을 택한다는 결과도 유사하다(이 부분까지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은 아니다).


  •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설정은 바로 소설 속의 짝수 장(2, 4, 6, ...)은 시간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에 쓰인 장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제배치하면, (1, 3, 5, ... , 19, '21그리고22', 20, 18, ... , 6, 4, 2)가 된다. 정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와 역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를 교차해 보여주는 배치는 영화 [메멘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결정한 요소이다. 연속된 두 짝수 장에서 한 문장씩(예를 들어 4장 첫 문장과 6장의 마지막 문장) 겹치는 것도 [메멘토]의 한 역순 시퀀스가 다음 역순 시퀀스와 한 장면씩 겹치는 것을 문자화한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이 사실을 정확히 알아챘을지가 걱정이다. 초반에는 이러한 역순 구조가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나 이러한 초반의 숨김도 소설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의도된 기작이었다. 가장 먼저 순서의 비일반적인 배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일어나는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짝수장에서 순수한 농업단체로 등장하는 '푸른'이 표방하는 불변과 안정의 이상이 실현되는 모습이다. 실제로 변화하는 것이 없으니 시간 순서를 뒤집어 놓아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작중 '그녀'가 죽인 사람들을 자신의 어머니가 죽어있던 모습으로 만들어 놓는 것은 그녀가 과거에 썼던 소설(부족과 남자의 이야기)이 실체화 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살해 장면 이전에도, '푸른'을 '그녀'의 소설 속의 '부족'에, '그녀'를 '남자'에 대응시키면 가능하다. 그러나 '그녀'가 양정산을 죽이고 특정 자세를 취하도록 시체를 조정하면서, 그러한 실체화는 더욱 선명한 모습을 갖춘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인 '그녀'가 '부족'에, 집단인 '푸른'이 '남자'에 대응되면서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사람의 시체에 특정한 조작을 가하는 것은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 [홀리모터스]의 한 장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 잡다한 모티브와 받은 영향들을 따로 빼서 정리해보자

    '그녀'가 사람들을 죽일 때 목에 칼을 꽂는다는 설정은(근본적으로 어머니가 목에 칼이 박힌 채 죽어 있던 장면을 쓰게 된 것은) 위 소개한 홀리모터스의 동일한 장면을 모트브로 한다.

    서현의 남동생의 유언장 속 마지막 구절인 '이게 정말 모든 것의 끝이라면, 난 무엇이든지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어.'는 오오누키 타에코의 노래, [4:00am] 속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가며 그녀가 하는 서현과의 포옹의 상상은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한 장면에서 모트브를 얻었다. 해당 영화도 레즈비언 퀴어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