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 Book Review - 6. 상실의 시대(원제: ノルウェイの森/노르웨이의 숲)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입학한 2025년, 그 한 해를 마쳐가며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상실의 시대]는 아마도 먼 훗날이 되어도 작가 개인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영화만을 바라보고 있던 작가에게 예술로서의 문학이 가지는 힘과 무게감을 단번에 체험하게 한 소설이다. 동시에 같은 작가의 [1Q84]를 읽으면서 아주 재미있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방면에서 취향에 더 잘 들어맞고 독서 자체에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는 [상실의 시대]가 조금 더 가깝다. 후보가 많지 않아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 물었을 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가 아닌 [로마]를 말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잘 짜여진 독창적인 플롯과 진하고도 어둑한 주제 의식으로 독자를 전율케하는 것도 좋지만, 낭만적인 표현들과 사랑이란 미묘한 대상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묵직한 여운을 선사하는 책에 더 끌리는 취향인 듯하다. 작가가 어린 시절에 푹 빠져들었던 [80일 간의 세계일주]나 [드라이]처럼 다른 책들을 접하며 자연스럽게 매몰되어갈지도 모르지만 [상실의 시대]를 읽는 동안에 느끼는 감정들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 근거 없이 주장하고 있다. 11월이 시작할 때 새로 구상하기 시작한 소설도 근본적으로는 해당 책과 그 근간을 공유하고 있다. 백일장을 위해 암울하고 희망 없는 이야기를 써내고 나서 낭만적으로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결정적으로 일깨워 준 것이 [상실의 시대]였을지도 모른다.
먼저 간단히 책에 대한 소개와 개인적인 경험 몇가지를 언급하며 글을 시작해보자. [노르웨이의 숲]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비교적 작가 활동 초반인 1987년 출간해 그를 현재의 스타덤에 올리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작품 중 하나이다. 하루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알겠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적어도 하나씩은 포함시키는 오컬트적, 초현실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철저한 리얼리즘으로 작성한 소설이기도 하다. 주로 애용하지 않는 스타일을 사용한 작품으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것이 꽤 인상적이다. 한국에서도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꾸어 출간한 후 90년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말 그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이었다. 그 이후에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을 달고 번역한 국내판이 다수 등장했으나 [상실의 시대]의 번역이 가장 좋다는 추천을 누나를 통해 전달 받고 해당 판을 고르게 되었다.
여러번 말하는 내용을 반복하자면,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먼저 책의 독자가 되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야기와 표현과 피어나는 감정들, 무엇 하나 뺄 것 없이 아름답고 애절한 소설이다.
줄거리
서른 일곱이 된 주인공, 와타나베는 보잉 747기가 틀어주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과거를 기억한다. 고등학생 시절 그의 유일한 친구 기즈키와 그의 여자친구인 나오코는 자주 와타나베와 함께 셋이서 만나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다 기즈키가 17살에 자동차 배기가스로 자살한 이후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둘 사이의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시작한다.
대학에 입학한 나오코는 마음의 병이 커져 교토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만난 레이코라는 여성과 친해진다. 그녀는 기타를 치는 사람이었고 나오코가 좋아하는 곡인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가 요양원에 찾아갔을 때도 이따금씩 연주해 주었다.
한편 와타나베는 대학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미도리라는 여자와도 친해진다. 작은 서점을 언니와 운영하는 그녀는 한편으론 명랑하고 자신감 넘쳐 보이지만, 어떠한 부분에서는 지칠대로 지친 사람 같았다. 그 둘은 사랑했고, 서로가 옆에 있어주지 않을 때 서로를 그리워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장례식을 마친 그 시간으로 길고 암울한 배낭 여행을 떠난다. 대학 수업을 가지 않고, 미도리와 연락하지 않고, 기즈키 이후 인생에 찾아온 거대한 죽음과 상실을 온몸으로 느낀다. 한 달 간의 여행을 마쳤을 땐 8년의 요양원 생활을 끝내고 와타나베의 집으로 오겠다는 레이코의 편지를 받는다. 나오코의 침울했던 장례식은 잊으라며 레이코는 기타를 계속해서 연주한다. 쉰 번째 곡으로는 [노르웨이의 숲].
그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한 달 동안 있었던 일, 이제는 세상에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그녀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녀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어?'라 묻는다. 이 질문을 와타나베는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 속에서 하나의 질문을 잉태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루키가 해당 소설을 '순도 100% 연애소설'이라 소개하듯이,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 와타나베와 그주위의 여자들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며 이를 통해 작품의 전체적인 정서를 구축해나간다. 그러나 작가가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가장 눈에 띄었던 주제는 바로 인생에 존재하는 어떠한 틈과 그 허무함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다른 하루키의 작품의 그것들과 비슷하게 입체적이거나 감정 서술을 풍부하게 부여받는 인물이 아니다. 여러모로 감정에 무뚝뚝하며 소설 읽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등, 하루키가 모든 작품에서 자기복제를 일삼는 형태의 남자 주인공이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수많은 감정 중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두 여자 사이에서 두 가지 형태의 사랑을 경험하는 기간 동안에도, 존재하는 빈틈에서 여전히 차가운 공기로 숨을 쉰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소설에서 보았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모든 인간은 어떤 순간엔가 갑자기 찾아오는 특유의 감정으로 아득한 고립을 경험한다. 그리고 소설은 그러한 만성적인 고립이 다른 어떤 사람과의 관계나 사랑으로도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 인물들을 통해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글은 이러한 주제를 와타나베와 나오코를 중심으로 몇몇 주요 장면들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3장의 끝에서, 돌격대가 와타나베에게 반딧불이를 선물한 장면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기억의 어둠 속에 잠시 몸을 담갔다. 바람 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뚜렷하게 들렸다. 그리 센 바람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선명한 궤적을 남기며 내 몸 주위를 빠져나갔다. 눈을 떠보니 여름 밤의 어둠이 조금 더 깊어지고 있었다.
나는 병뚜껑을 열고 반딧불이를 끄집어내어 삼 센티미터쯤 튀어나온 급수탑 가장자리 위에 놓았다. 반딧불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듯했다. (...)
나는 난간에 기대어 선 채, 그런 반딧불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반딧불이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바람만이 우리 주위를 스쳐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느티나무가 그 무수한 이파리들을 서로 비비고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계속 기다렸다.
반딧불이가 날아오른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반딧불이는 뭔가를 떠올린 듯 갑자기 날개를 펴더니, 그다음 순간에는 난간을 넘어서 옅은 어둠 속에 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일어버린 시간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급수탑 옆에서 제빨리 포물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빛줄기가 바람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기라도 하듯 잡시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반딧불이가 사라져 버린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연약한 흐린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혼백처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매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어둠 속으로 몇번이고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자그마한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끝의 바로 조금 앞에 있었다.
금요일 밤 기숙사 소등 후, 자습실로 이동해 이 부분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감정적으로, 혹은 미학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뒷부분을 순식간에 읽게 만든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장면이기도 하다. 다소 보편적인 상징과 표현을 사용했다거나 심하게는 감상주의적으로 연출된 장면이라고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당 마무리는 소설의 주제와 정서를 독자에게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그 신비로운 세계로의 인력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다.
먼저 미학적인 관점에서, 해당 장면은 독자를 와타나베 내부로 끌어들이는 자연스러운 특유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단적으로, 책은 반딧불이가 병에 담겨있을 때부터 그것의 모습과 움직임을 끊임없이 관찰한다. 이후 급수탱크 위에서 반딧불이를 놓아주고 이를 계속해서 관찰하는 와타나베의 행동을 독자 일치시키며 인물로의 몰입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진다.
어둠, 바람, 반딧불이의 빛이 가지는 이미지가 뒤로 갈수록 점점 압축되고 정제된다. 하나의 점으로 빛나는 반딧불이의 이미지는 다소 클리셰적인 공간에서 참신한 차별점이 된다.
고찰과 관찰, 그 사이 어딘가의 문장으로 끝맺는 구조는 하루키의 정수라 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고 그의 작품 여러곳에서 등장한다. 직전까지는 주로 반딧불이를 관찰하기만 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마지막 단락의 두 문장은 독자에게 단순 수사적 질문이 아닌 '왜 나는 어둠 속의 저 빛을 만질 수 없는가' 라는 일종의 실존적 물음을 던져준다.
특히 '바로 조금 앞' 이라는 구는 시적인 리듬감뿐만 아니라 반딧불이의 불빛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와타나베의 감각적인 시선과, 닿을 듯 닿지 않고 멀어져가는 빛에 대한 애절함이 자연스레 담긴다.
해당 장면이 가지는 주제적 위치 또한 그 미학과 여운처럼 결코 가볍지 않다. 돌격대가 와타나베에게 반딧불이를 선물하기 직전까지 소설은 그가 나오코의 20살 생일을 보낸 뒤 그녀와 자고, 연락이 오지 않는 그녀를 향해 편지를 쓰고, 나가사와 선배를 따라 여자와 자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와타나베는 나오코로부터 요양소로 떠난다는 편지를 받는다.
이 과정을 통해 와타나베는 바깥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을 느낀다. 그는 20년이 지나 회상하고 있는 지금도 나오코와 잔 것이 잘 한 행동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가사와 선배와 함께 모르는 여자들과 자는 것에 대해 '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오코는 멀리 떠나갔다. 급수탑 위에서 그 주위로 드리운 여름 밤의 어둠은 마치 그의 현재 인생에도 내려앉은 듯하다. 반딧불이가 떠나가고, 반딧불이가 남긴 불빛마저 그를 떠나간다. 멀리서 도시의 불빛이 아른거리는 광경이 보이는 급수탑 위에서, 와타나베는 반딧불이가 남긴 잔상에라도 손을 뻗어본다. 그러나 이미 나오코는 만날 수 없게 된 이후였다. 혼자가 된 그 주위를 바람이 쓸고 지나갈 뿐이었다.
6장 전체는 책의 4 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을 들여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보기 위해 찾아간 요양원 '아미료'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그곳에서 그가 새로 만난 레이코씨가 주인공인 파트라 할 수 있다. 분량이 분량인지라, 특정한 부분의 문학성보단 '아미료'라는 공간을 꾸며 나가는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바깥 세상과 독립된 작은 공간에는 '하루키가 말하는 세상'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특유의 공기가 그 축소판으로서 드리워 있다. 먼저 와타나베의 인생과 접점을 가졌던 사람들(기즈키, 나가사와, 하쓰미, 미도리)은 자신이 품은 불완전함과 여러 문제점들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요양원 안에서 살아가는 레이코와 나오코는 그러한 종류의 숨김이 한계에 다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대해 정직할 것을 중요한 규칙으로 삼고있다. 와타나베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끊임없이 회전하는 사람들의 정신없는 활동들을 관측하지만, 아미료는 한없이 조용한 평화가 내려앉은, 안정된 장소로 묘사한다. 거시적인 분위기의 묘사 외에도 반복되는 루틴을 지키고 절제를 중시하는 생활은 여러번 직접 언급된다. 정적과 순수함이라는, 순백과도 같은 요소들을 부드럽게 한데 섞어놓음으로써 소설은 독자도 와타나베와 함께 자연스레 피어난 그 치유의 공기를 들이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이 겪은 아픔의 무게감은 한치의 가감없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를 위한 요소 중 하나로 나오코, 레이코와의 중요한 대화들이 대부분 어두운 밤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있다. 밤에 이어가는 긴 대화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자기 전 휴식과 함께 하는, 특유의 포근함과 피곤함이 공존하는 대상이다. 이에 더해 산속 오지에서 더 빨리 찾아오는 깊은 어둠은 흔히 '새벽감성' 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공기를 강화하며 이야기의 진솔함을 더한다.
나오코가 '아미료'에서 보여주는 대화 주제와 이를 말하는 말투는 그녀가 가진 현재의 문제들에 대해 그 원인을 과거 이야기에서 찾으려는 듯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이는 이전 장, 그녀의 편지 속의 '하지만 나 같은 입장에 처해 몇 달이고 치료를 받다 보면 많든 적든 분석적이 되어버리게 돼.' 라는 구절과 겹쳐지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버린 그녀의 성격은 한 번 오열하고 난 뒤, 기즈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우리는, 세상에 진 빚을 갚아야 했을 테니까.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말이야. 우리가 지불해야 할 때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지서가 이제야 돌아온 거야. 그래서 기즈키는 그렇게 되었고, 나는 이렇게 지금 여기 있는 거야."
위 두 구절을 포함해 나오코는 와타나베와의 대화에서 '이미 어떻게 되어버린 것' 혹은 '만약 어떻게 된 이후에는...' 과 같이 명확히 정해진 대상이나 상태에 기대어 이야기하는 성격을 보인다. 분석적인 성격을 얻었다는 그녀의 말에 따라, 이는 현재 품고 있는 문제의 발생을 과거의 일로부터 논증하고 처리해나가는, 일종의 능동적인 회복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즈키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될 때면, 그녀는 조금씩 '과거에 그랬기에 어쩔 수가 없다' 라는 성격의 비관적 논조를 띠게 된다. 이를 통해 소설은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과거를 바라보고 고찰해나가는 나오코의 행위가 가지는 양날의 검과 같은 면모를 강조한다. 그중 벌어진 상실을 마주한 개인이 이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며 어둠 속에 갇히게 되는 과정을 두드러지게 담은 것이 인상적이다.
'아미료'에서의 첫 날 밤을 보내다 새벽에 깨어난 와타나베 앞에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나오코는 나체로 앉는다. 그리고 소설은 그 기묘하고 마법 같은 장면을 완전한 고요와 희미한 달빛을 통해 연출해낸다.
달빛에 비친 입술의 그림자가 떨리는 모습을 소리 없는 속삭임으로 묘사한 것이 정말로 탁월하다. 달빛이라는 보편적인 상징물과 입술이 만들어낸 작디작은 그림자는 그 공간 만이 가진 몽환적이고 차가운 고요의 질감을 새겨넣는다. 그리고 나오코의 떨리기만 하는 그림자는 당연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마치 과거에 짓이겨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지금의 여러 문제점을 마주한 그녀의 상황과도 같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그러한 그녀를 통해 많은 것을 듣는다. 성적인 흥분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에 가깝게 다져진 아름다움을 갖춘 육체를 보고 그는 '아미료'에서의 생활을 본다. 그리고 그 육체는 그가 몇 달 전 끌어 안았던 불완전한 나오코의 몸과 그 감촉이 만들어낸 사랑을 되세기도록 이끌었다. 와타나베가 전달 받은 그것들이 바로 떨리는 그림자가 내는 소리 없는 속삭임인 것이다.
둘째 날 낮, 소설의 가장 앞 부분에서도 소개되었던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떠난 산책은 그 1장에서의 섬세한 묘사와 함께, 미지의 숲을 탐험하듯이 나오코와 둘이서 잡목림 속을 거니는 와타나베의 설레고도 따뜻한 시선이 눈앞에 떠오르게 한다. 여러 이야기를 한 둘은 초원의 마른 풀 위에 누워 포옹하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나오코는 기즈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것을 손으로 해준다. 순수한 자연에 감싸 안긴채 서로의 중요한 것을 교환하는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모습은 소설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친밀하며 사랑스러운 순간을 조각해낸다. 동시에 어딘가 슬프고 애절해지기도 한다. 나오코는 어떤 말로도 자신의 진심을 완전하게 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루만짐은 그녀가 새벽 이후 그와 이루어낸 대화의 한 형태였다. 그때 나오코가 가진 가장 소중한 애정과 마음은 말하지 못할 침묵과 다정한 손의 움직임만으로 그에게 전해졌다.
다음으로 레이코라는 인물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나이와 주름이다. 이를 통해 소설은 그녀가 가진 특유의 쾌활한 성격에 노련함을 섞으며 그것이 단순이 가벼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설정이 아님을 드러낸다. 오히려 나오코가 레이코와의 대화에서 보여주는 특유의 편안한 케미를 더욱 깊고 정감 가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성격이 있다. 그렇게 형성된 서로를 의지하는 둘만의 분위기는 '아미료'의, 즉 바깥 사회에는 없는, 근본적인 치유를 요약하듯이, 독자를 단번에 미소짓게 한다. 주제적으론 나오코, 기즈키, 와타나베 사이에 놓인 길고 복잡한 상실의 굴레와 레이코라는 인물을 가장 가까이 배치함으로써 그것이 젊은 세대의 것만은 아님을 역설한다. 레이코가 벤치에 앉아 와타나베에게 들려주는 긴 이야기는 이러한 상실의 테두리를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확장해나간다.
이때 레이코의 말투 또한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또 펑! 하고 터지고, 나사가 빠지고, 실타래가 엉키고, 머리가 캄캄해지고.
레이코는 마음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렸던 '펑!' 상황을 의성어와 비유를 반복하여 사용해 설명한다. 이를 통해 그 경험들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줄여나가려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노력이 보인다. 혹은 '아미료'의 안정 속에 몸을 너무 오래 담가 과거의 당혹스러웠던 그 경험들을 진중하게 묘사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미학적인 부분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몇가지만 살펴보자.
(중략)
셋이 촛불 주위에 둘러앉아 가만히 있자니, 마치 우리 세 사람만이 세상의 끝에 남겨진 것처럼 보였다. 호젓한 달빛의 그림자와 촛불의 빛에 흔들리는 그름자가 하얀 벽 위에서 서로 겹쳐지고 교차하고 있었다.
나오코와 레이코가 목욕하러 갔을 때 와타나베가 샤워를 끝내고 달빛이 가득 채운 그 방의 그림자와, 그녀들이 돌아왔을 때 함께 초에 불을 붙이고 난 후의 그림자를 병치시키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방에 혼자 남은 와타나베는 어둡고 푸른 계열의 달빛이 사물과 만나 드리우는 그림자를 관찰한다. 그리고 셋이 있는 방의 벽에는 노랑 계열의 불빛이 사람들로 그리는 그림자가 보인다. 달빛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완전하진 않더라도, 확연한 색체의 대비는 그 공간의 분위기와 공기가 두 여자로 인해 한층 더 따뜻해졌다는 와타나베의 감정을 전달한다. 더불어 여러 그림자가 교차하는 이미지가 선명하며 문학적이다. 여러 사람들과 여러 광원들로 인해 생겨나는 그림자가 뒤쪽 벽에서 이리저리 겹쳐지는 모습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잊지 못할 광경은 아니지만, 시선을 자연스레 빼앗기면서 소소한 마법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수의 그림자들이 겹쳐지는 이미지 자체가 '일상에서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아름다움'이라는 대상을 적절히 요약한다는 뜻이다. 그 소소함과 아름다움의 예술적이고도 감각적인 교차는 해당 장소가 가지는 특유의 온정과 가치를 세심하게 구축해낸다.
"그건 나 역시 몰라." 하고 레이코 씨는 말했다. "나오코도 모르니까. 그건 둘이 서로 잘 이야기해보고 앞으로 결정 지을 일이야. 그렇잖아? 설사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그걸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거야.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 일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그 뒤에 다시 생각해보면 되지 않을까?"
이 대화를 미학적인 탁월함으로 받아들였다고 말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레이코와의 첫 대화에서 잠깐의 침묵을 깨고 진중하게 말을 꺼내는 와타나베와 이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는 감상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자신이 나오코에게 한 일이 옳은 일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와타나베에게 레이코는 그녀와 직접 대화하며 풀어 갈 것을 희망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나오코는 앞서 보인 듯 말에서 침묵으로, 다시 몸짓으로, 그와의 연결 고리로서의 대화라는 행동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게 된다. 마음과는 상관 없이, 치유로서의 대화가 줄어든 나오코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떤 측면으론 알게 모르게 고립되어간다. 6장 전체를 읽고 다시 보았을 때, 레이코와 와타나베의 희망이 어떻게 부정되고 있었는가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가끔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밤 짐승들이 숨을 죽이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런 무거움이 숲 속에 떠돌고 있었다.
기즈키 이야기를 하다 울음을 터트린 나오코가 진정할 때까지 밖에 나가 있어달라는 레이코의 부탁을 받고 와타나베가 어두운 '아미료'의 거리를 거니는 장면이다. 뭔가 자신이 잘못해 일이 틀어진 것 같아 불안한, 그의 걱정과 미안함을 짐승들의 숨죽임을 통해 참신하게 표현하였다. 동시에 방 안 쪽 상황과 대비되는 '아미료'의 기묘하기도 한 고요의 무게감이 전해진다.
6장의 끝을 포함하여 10장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점차 가라앉아가는 분위기를 통해 더욱 근본적이고 어떤 면에선 일반론적인 주제를 심화해 나간다. 글의 서두에서 말한 일상에서 찾아오는 특유의 아득함과 고립감이 바로 그것이다.
하루키는 와타나베의 내적인 독백을 늘리고, 미도리와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나오코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등 여러 요소들을 동원해 그러한 고립감을 구체화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감정이 묻어나오는 곳은 일상을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기도 하다' 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이 바로 '태엽 감는 생활'이다.
해당 구절은 이후 와타나베가 나오코에서 쓰는 편지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등장할 때마다 편지 글 전체가 가진 정서적인 힘을 마법처럼 향상시키는 능력이 있다. '태엽을 감는다'라는 행동이 주는 고유한 뉘앙스가 독자들을 소설 후반부의 분위기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7장 나오코에게 쓰는 편지에서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십 번, 몇백 번이나 반복하게 될 것인가, 하고 문득 생각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 하고 나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없는 자신의 생활을 기계적이거나 고체적인 성격의 '태엽'을 감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때 마치 유기성과 비유기성처럼, 그가 살아가는 '사랑 섞인 삶'과 '태엽'이라는 개념은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동시에 이는 '반복되는 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돌아가는' 이미지를 통해 그의 삶과 묘한 접점을 가진다.
더 나아가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감는 행위'와도 같다면, 그 행위 자체가 가지는 특유의 항상성과 연속성을 '삶'의 주요한 특징으로 놓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후반부에서 두드러지는 와타나베의 차분하고 사색적인 화법과 연관 지어 해석한 그의 문학적 성격은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의 사유'가 된다. 실제로도 와타나베의 밀도 높은 독백에서는 다소 서사적인 전반부와 대비되며 아이러니한 연속성을 띤 흐름이 느껴진다. 이를 통해 소설은 일상에 고독이 묻어나오는 과정을 와타나베의 관계적 고립의 심화를 바탕으로 설명한다. 그런 환경에서도 '태엽을 감듯 지속되는' 삶으로부터 연속성에 의한 거대하고 필연적인 공동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느낄 수 있다. 소외와 허무가 확산되고 일반화되던 그 '상실의 시대'만의 변화무쌍한 공기와 함께 말이다.
'태엽 감는 생활'에 부여한 사색적 고독의 여운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보여준 그의 일요일은 색다른 색체감의 고립을 빠르고 정밀하게 내재화한다. 그 순간 접하는 와타나베의 '일요일에는 태엽을 감지 않는다' 라는 선언은 아주 충격적이다. 해당 문장은 별다른 일정 없이 산책과 독서를 반복하는 와타나베의 일요일을 외적인 무력이 추상적인 영역에서까지 발현되는 현상으로 확대한다. 또한 이는 독자에게 일요일의 고립이 놀라울 정도로 감각적인 방향에서 체화되는 경험과 묘한 병치를 이룬다.
그의 일요일은 말 그대로 아픈 나날이라 하기에는 너무 평화롭고, 여유로운 휴식이라 하기에는 너무 고독하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까지 멎어버린 것 같은 그 역설적이고 공허한 공기는 우리를 탈출할 수 없는 근원적 고독에 가둔다. 시간이 흐르든, 흐리지 않든, 고독은 그곳에 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는 와타나베의 마지막 질문은 의미를 얻는다. 그는 희미해져 가는 반딧불이의 불빛을 바라보며 급수 탑 위에 앉아있는가, 나오코의 손길을 느끼며 그녀의 품 속에 안겨있는가, 조용히 태엽을 감다가 결국은 돌아와 버린 일요일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가. 그 기억들은 그를 그 때의 그 특수한 장소로 대려다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아득히 멀리,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떨어트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디'라는 단어는 그들과 자신 사이의 위치 관계를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와타나베를 표현한다.
어느 한 점에서는 만날 수 있을지, 끝없는 평행선을 그리며 저 멀리 나아갈지 말이다.
이러한 주제적인 분석도 글의 통일성을 위한 일종의 방편에 불과할 뿐, 작가가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가장 끌렸던 부분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대상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두 부분 모두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문학적인 표현을 위한 테크닉들에 관심이 생기고, 이에 따라 책을 보는 관점이 어느 정도 이동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결론적으로 느끼기에는 내용과 미학, 이 둘의 감상 비율이 최적의 그것에 한발짝이나마 가까이 다가간 것 같다. 물론 이 문장이 내포하듯이,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주제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11월 28일 금요일, 5교시부터 한 시간이 넘게 노트북으로 영상을 보다가 펼쳐든 [상실의 시대]를 저녁 시간 직전까지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10장의 와타나베의 편지에서 '태엽 감는 생활'을 보았다. 그리고 나오코의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전하는 레이코의 편지를 읽은 뒤 너무 슬퍼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렇게 보편적인 주제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섬세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른 것인지, [상실의 시대]가 과거에 읽었던 책들과 다른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해당 작품이 작가 개인에게 미친 영향은 두 경우 모두에서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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