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 Book Review - 9. 학문의 즐거움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잊어버린다. 열심히 외운 공식도, 애써 이해한 개념도 시간이 지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뜬구름처럼 흐려진다. 학문을 익히는 과정에서 누구나 마주치는 이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결국 잊혀질 것을 알면서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필즈상 수상자인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학문의 즐거움”에서 자신의 인생과 탐구를 통해 얻은 답을 내놓는다. 그의 답은 바로 "지혜"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망각과 지혜, 그리고 공부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왜 공부를 해야 할까. 공부는 때론 재미있지만, 때로는 어렵고 지루하다. 게다가 공부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잊어버리고 만다. 사실 망각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기능이다. 힘든 일을 극복하게 해주는 정신의 보호 기제이며, 쓸모없는 정보와 사건을 뇌에서 밀어내어 부담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망각은 공부를 허무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열심히 학습한 지식도 암기한 개념도 어느 순간 휘발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잊혀질 지식을 왜 공부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히로나카는 이 질문에 "지혜"라는 답을 제시한다. 공부한 지식은 잊혀져도, 그 과정에서 얻은 삶과 학문의 지혜는 남아 가치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망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망각이란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습득한 정보를 "바로 이용할 수 있는 형태"에서 "바로 이용할 수 없는 형태"로 바꾸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로 이용할 수 없게 된 기억이야말로 지혜로 남아 뇌의 "여유"가 된다고 말한다. 비록 잊혀져서 즉시 꺼내 쓸 수는 없더라도, 공부한 내용은 어떤 형태로든 뇌에 남아 있기에 공부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나에게 공부는 지혜를 쌓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학문을 탐구하며 마주할 문제들에 최선의 방법으로 접근하기 위해 지식을 쌓는 훈련이다. 지식은 단순히 저장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 꺼내 쓸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책이 도서관에 있어도, 꺼내 읽을 수 없게 깊숙이 숨겨져 있다면 그 누구도 그 지식의 존재조차 알 수 없다. 나는 뇌 역시 일종의 도서관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학습한 지식과 겪었던 경험은 마치 책처럼 파편화되어 뇌 곳곳에 저장되어 있다.
히로나카는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의 양에 대한 바로 사용할 수 없는 지식의 양의 비율이 곧 "여유"이며, 이 여유야말로 지혜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지혜란 삶의 경험이라는 빅데이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실제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아무리 바로 사용할 수 없는 지식이 쌓여 지혜가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지혜마저 즉시 꺼내 쓸 수 없는 형태로 남아 있다면, 지혜로서의 실질적인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공부의 진정한 의미는 어질러진 책들을 도서관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하듯, 바로 사용할 수 없는 지식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공부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 자체로 의미를 찾는 행위가 아니라, 쌓인 지식을 살아있는 형태로 유지하고, 필요한 순간 적재적소에 꺼내 활용하는 능력을 길러가는 끊임없는 훈련의 과정인 것이다.
히로나카는 이어서 학문을 탐구하는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학문은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절대 포기하지 않을 때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심한 자세로 포기할 줄 알 때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심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것은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을 뜻한다. 문제가 어려워서 겁을 내는 소심함이 아니라, 문제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그것을 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풀지 못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고 더 열린 마음으로 문제를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포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을 실패자로 여기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만이 성공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히로나카의 의견에 동의한다. 포기는 문제에 얽매여 고여버린 정체된 사고의 흐름을 초기화시켜주고, 부담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문제에 임할 수 있게 함으로써 더 열린 사고를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린 사고는 더 다양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므로, 결과적으로 정답에 가까워질 가능성을 높여준다. 물론 포기하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잘못된 방법일지도 모르는 길을 끝까지 우직하게 따라가는 것만이 옳은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학문의 즐거움"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조언은 결국 "문제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로나카는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을 손안에 꽉 붙잡아두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숙성되어 지혜의 형태로 진화하도록 두는 것이야말로 공부의 진정한 의의라고 주장한다. 또한 문제 해결에 집착하기보다는, 막혔을 때 한 걸음 물러나 돌아가는 방법으로 더 편안한 마음과 자유로운 사고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탐구자로서 우리가 갖추어나가야 할 마음가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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