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들
취미이기도 하고, 연습이기도 하다. 200자 원고지 10매 이상의 짧은 이야기들.
1
내가 기차에 탔을 때 나의 모든 물건과 짐을 집에 있었고, 나는 창밖에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깥 공간은 어두운 남색으로 빼곡히 채워졌고 하늘 위에선 두터운 구름이 뒷배경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기차 안보다도 어두운 바깥이었다. 얇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 몇 개는 창문에 바로 붙어서 기차 복도의 조명 빛을 받았다. 그 바로 뒤에 보이는 같은 나무의 나뭇잎 무리보다도 선명하게 빛을 내는 그 조그마한 초록색 타원체들은, 눈이 부시기라도 한 듯이 제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빗소리를 배경음으로 해, 그 흔들림이 창문 유리와 마찰하는 소리가 포근하게 울렸다.
나는 창가 쪽 의자에 앉았다. 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릴 필요도 없으니, 바로 자리에 앉은 뒤 외투만 벗으면 됐다.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내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무릎 위에 말아두었던 외투를 들어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몸이 한 층 더 가벼워졌고, 나는 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했다.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빗속을 질주하면서 그녀의 몸으로부터 멀어져가고, 그녀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녀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녀의 앞으로의 행복을 빼앗을 대상을 막아주지 못해 미안했다. 전부 내가 과거에 그녀와 약속했던 것들이다. 그것들을 약속할 때는 모두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런 순수하고 순수했던 믿음들까지도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지금 나는 현재에 살아가고 있으며, 무엇인가가 나를 미래로 이끈다. 오직 그녀만이 과거에 남겨져 있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서, 과거의 그 시점에 정지해 있다. 나는 그녀가 담겨있던 몸으로부터 멀어져가면서, 그녀가 존재했던 시점으로부터 멀어져간다.
그녀는 건물 계단을 오르다 실족한 뒤로 의식을 잃었다. 그녀의 목뼈는 잘 이어진 채로 보호 장비에 감싸져서, 병원 침대 특유의 평평하고 부실한 배게 위에 놓여있다. 흰 바탕에 수놓아진 얇은 푸른색 줄무늬 자수는 그녀가 누워있는 부분 주위에서 휘어졌다. 병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아득하고 먹먹해서, 마치 그 공간이 헤엄쳐나가야 하는 유체로 채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점성이 물보다는 약하고, 공기보다는 강한 미지의 물질을 사이에 둔 채로 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내려보았다. 그녀의 눈은 봄날의 부드러운 풀 밭 위에서 잠 든 시골 소녀의 눈처럼, 지그시 감겨있다. 눈을 뜨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을 마주하기가 두려워서도,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나 따분해서도 아니다. 단지 그런 느낌에 대한 의식 활동을 처리하지 못할 뿐이다. 그때 그 공간 속에서 눈을 뜬 채로, 의식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뿐이다. 그것은 아무도 없는 빈방에 홀로 서서, 어쩐지 식어버린 것으로 보이는 차가운 가구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침대, 창틀, 시계와 함께 그녀가 놓여있는 것이다. 빈집에선 아무리 많은 가구들과 함께하더라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오는 걸 막을 수 없다.
나는 내 휴대폰을 켜고 가장 먼저 나오는 배경 화면을 보았다. 나는 그 사진을 대학에 갓 입학한 봄에 찍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론 벚꽃 나무 하나가 두 건물 사이에 우뚝 자라 있었다. 여기저기 뻗어나간 나뭇가지 끝자락에는 하얗고 연분홍스러운 벚꽃잎이 몽글몽글 피어있다. 창틀은 햇빛을 받아 밝고 눈부신 옅은 갈색으로 빛났다. 나는 큰 갈색 책상 앞에 앉아 건너편 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건너편 의자가 햇빛에 비친 둥그런 그림자가 책상 위로 길게 드리웠다. 벚꽃 그림자는 누군가가 쏟아버린 음식물의 자국처럼 책상 위에 흩뿌려졌다. 나는 내 아래 책상과 창밖의 벚꽃 나무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넋을 놓았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나는 아직도 창문에 묻어있는 빗방울이 구름 틈새로 흘러 들어온 햇빛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그 벚꽃의 그림자를 기억했다. 바깥이 기차 안보다도 밝았다. 그러나 기차는 빛내림을 빠르게 벗어났고, 그림자는 사라졌다. 깊고 어두운 남색이 다시 눈앞에 드리웠다. 그래서 나는 창문에서 눈을 때고 흰 형광등 빛만이 보이는 기차 복도 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
병실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그녀 옆을 지키면서 그 사진 속 장소로 그녀와 함께 찾아가고 싶었다. 그녀를 소복이 덮은 얇은 파란 줄무늬 이불 위로 창밖의 나뭇잎의 흔들리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둥그런 그림자 조각들이 서로 섞이면서 이뤄내는 무질서는 서로 다른 순간의 ‘나’들을 하나로 이어준 듯하다. 대학교 1학년 그곳에서도, 그녀와 함께한 병실에서도, 지금 이 기차 안에서도 내 머리 위에서 공간을 비추는 건 하얀 형광등이었다. 수줍게 떨리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셋 중에 오직 지금, 그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리고 오직 지금, 나는 그녀와 함께하지 않았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뒤로 그녀와 그녀의 친구가 걸어갔다.
“야, 야 저기 봐봐. 너무 예뻐.”
“어 진짜로, 예쁘다. 그런데 어떡해. 시험기간이야.”
“아, 진짜로 너무 예쁜데 시험기간이야. 너무 예뻐, 어떡해.”하고 그녀는 내 바로 뒤에서 사진을 찍었다.
2
눈앞은 어두웠고 차가운 공기가 순간적으로 내려앉은 느낌이 등 뒤에서부터 전해졌다. 타원형 전등이 원판 밑에서 내뿜는 가로등 특유의 창백한 빛이 공간을 채웠다. 모든 것이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새삼스럽게도 나는 지금 그것들의 상태를 하나하나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하고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노란색 스웨터에 내려앉은 가로등 빛 그림자가 크게 변했다. 아래로 죽 뻗은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들과 뒤섞이며 알 수 없는 상호작용의 규칙을 확립해 갔다.
“나는 그때 진지했다니까. 그런데 내 언니는 하나도 안 그래. 언제나 그랬지. 웃기지 않아?”
“그런데 너 기분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지. 나였어도 네가 갑자기 그러면 못 참겠다. 일반적으로 웃기지 않은 상황이 아니야.”
“아, 진짜 내가 너한테 무슨 말 들으려고 이 얘기를 꺼낸 거냐. 됐다, 됐어. 너는 남자라는 게, 아휴. 너 알아서 해라. 그렇게 평생 잘살아라, 그냥.” 그녀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아, 내 언니는. 진짜로.”
“그런데.”하고 나는 숨을 들이쉰 다음에 다시 내쉬었다. “좋은 거 같아. 너는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고. 나는 지금 부모님 이야기는 생각하기도 힘든데.”
“아니 그거는 좀 다르지. 니 부모님은 이혼한 거고, 내 언니는 그건 거잖아.”
“그니까. 어쨌든. 너는 무슨 일 있어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 같다고. 봐봐,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있는 것도 얼마나 좋은 일이냐?”
“나라고 해서 뭐 아무 생각 안 하고 사는 줄 알아? 진짜로. 나도, 어쩌면 그냥 타협하는 거 같은 거야. 나한테 벌어지는 일들이랑, 나랑. 이 둘 사이에서 이거는 안 되겠다, 이 정도는 뭐 괜찮다. 이러면서. 나라고 모든 걸 다 가져가는 게 아니라고.”
“그래도. 니 언니 너 엄청 자랑스러워했던 거 알아? 아마 지금의 너를 봐도 그럴걸. 내가 이 말을 해서 조금 쑥스러워할 수는 있으시겠지만.”
“그게 무슨.” 하고 그녀는 화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걸 봐. 이게 뭐야.” “그래. 언니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는 건 알겠어. 그건 말이 되지. 근데 지금 이걸 봐봐. 내 재능도 제대로 활용도 못 하고. 이렇게 이상하게 살고 있고. 언니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고 하면, 아마도 뭐하고 있는 거냐고 짜증부터 낼 거야. 평소에 맨날 하던 그거 있잖아. 안 진지한 척하면서. ‘야, 너 이게 뭐냐.’ 하면서 입을 때겠지.”
“과연.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너는?”
“그렇겠지. 언니는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될 거라고 기대했어. 내 재능은 특별하고 내 흥미 분야도 특별하니까. 어딘가 한 구석으로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갈 거라고, 인생에서. 이렇게 믿고 있었겠지. 이런 말들은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해줬는데.” 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의 그림자가 스웨터 위로 드리우고 바람에 맞춰 찬찬히 흔들렸다. “이상해. 내가 이런 거 모를 줄 아나 봐. 내가 아직 초등학교 갓 졸업한 그런 버릇없는 애기로 보이나 봐. 고작 몇 살 차이 난다고.”
“그래서, 언니가 그렇게나 기대를 해줬는데 왜?”
“그런데 이걸 봐봐. 난 언니가 죽으면서 모든 걸 내려놓았어. 내 공부도, 나중에 계획도, 내 원래 생활도. 다 사라져 버렸어. 그래서 내가 지금, 아직 가지고 있는 것 중에는 특별한 게 아무것도 없어. 지금 이렇게 한탄하는 내 마음 말고는, 아마도.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특별한 걸 가지고 있었다가 잃었기 때문에 그런 것뿐인데. 이런 것도 특별함 축에 끼워 주는 거야? 최악인데.” “그래서 내 언니는 나에 대해서 기대하거나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정확히 말하면 사라져 버린 거지. 이런 걸 알고 죽은 거기는 할까?”
“음” 하면서 나는 궁금해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 알고 있었겠지.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그걸 좋아해 줄 정도였으니까. 근데 그렇게 잘 알고 있었으면,” 하고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알고 있었으면, 무슨 유서 같은 거라도 남겨주지. 무슨 생각을 했다느니,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느니, 이런 거 조금이라도. 내가 잔뜩 인생을 망쳐갈 걸 알면서도,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몰랐던 거야? 내 특별함을 지켜줄 수는 없었던 거겠지?”
“그런데 말이야.” 하고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이때 내 그림자가 변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특별하지 않아도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게 존재하지 않을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건 없어.”
“아니야. 특별하지 않아도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건 존재해.”
“정말? 특별하지 않아도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게 존재해? 정말이야, 누나?”하고 나는 나에게 물었다.
“특별하지 않아도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건 존재해.”하고 나는 내게 대답했다.
3
안방 화장실의 문은 열려 있었고 세면대 거울에 내 아내가 걸어가는 모습이 비춰졌다. 그녀는 목욕을 마친 다음 항상 잠옷으로 입는 하얀 면 티셔츠와 체크무늬 긴 바지를 몸에 두르고 하품했다. 자주 봐와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그녀가 입은 옷들은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그녀 자신의 피부처럼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목욕과 양치를 한 번에 하므로 바로 침실 불을 끄고 ‘피곤해’하는 혼잣말을 한 다음 침대에 누웠다. 나는 화장실 문을 닫았다. 거울에는 내 모습만이 흰 배경을 뒤로 한 채 보였다.
나에게는 스무 살이 되고 나서부터 길게 짝사랑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대학의 한 해 선배로 만난 1학년 늦가을부터 시작되었다. 언제는 내 머릿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는 걸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날 나는 그녀와 함께 조용한 식당에 들러 조용한 점심 식사를 했다. 우리 둘 이외의 손님이 없었으므로 음식이 나온 이후에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나 주방에서 들려오는 요리 소리가 없었다. 주문한 요리를 준비할 때마저도 큰 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바깥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소리만을 듣고 있던 나는 음식을 한 입 먹고 지은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그녀는 한 번 옅게 감탄한 다음 움직이지 않았다. 고요한 공기 속에서 머리카락이 휘날리지 않았고 닫힌 입에서는 어떤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조그마한 턱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부드러워 보이는 입안의 음식물을 정성 들여 씹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마저도 이빨을 사용해 음식물을 소화에 편리한 상태로 갈아내는 저작운동이 아니라, 요리의 부드러움을 최대한 정밀히 감지해 내려고 그것을 다양한 기관들로 눌러보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눈에 초점을 두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턱을 움직였다. 그녀의 입꼬리는 턱의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날 밤, 내려다보는 구도로 보여진 그녀의 미소와 음식을 삼키고 정말 맛있다고 신나게 말한 그녀의 목소리와 조금의 시간만큼을 장악했던 그 공간의 긴장을 되새겼다.
오랜 시간 만나오면서도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이미 그러한 관계에 적응하고 꽤 만족스러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면 나는 그 행동에 기뻐한다. 그것은 우리 둘 사이의 관계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으며, 내가 살아가는 삶을 구성하는 원리 중 하나였다. 아주 단순한 규칙이었기 때문에 세심한 조정이나 주위 깊은 점검을 행하지 않아도 아무런 오류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그 안정화된 시스템을 이루는 구성 요소로서 각자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있었다.
내가 서른 살이 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던 중 그녀가 터져버렸다. 내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지는 고무풍선처럼 그녀의 몸이 터지면서 살점과 옷가지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연분홍색의 그녀 조각은 길바닥에 으깨진 자국으로 묻어나오거나 바로 옆 건물 창문에 튀었다. 내부까지 깔끔하게 건조되거나 냉동 처리되어 있던 육류 가공품이 부서진 것처럼 예상보다 질척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 대신에 색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고운 분말이 그녀의 몸이 위치했던 자리에서 쏴아 하고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침침해졌고 나를 둘러싼 공간으로 들어오는 빛들은 산란 되었다. 나는 그녀의 살점이나 쏟아져 나온 분말을 뒤집어쓰지 않았다. 그녀가 터질 때 났을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소리였던 것인지는 지금도 짐작할 수 없다.
결국 나는 멀쩡하고 그녀만이 시스템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시스템 속 일부가 사라지는 것은 전체가 망가지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일이었다. 남아 있는 일부는 자신이 가진 역할과 가치를 잃지만 계속해서 존재해야 한다. 자신이 놓여있는 장소도, 하는 일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도 모두 의미를 잃게 된다. 어째선지 꺼지지 않는 존재와 인식의 불씨를 붙들고,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끝을 향해 천천히 이동할 숙명만이 주어진다. 그 무의미한 내리막길을 언제까지나 따라가기만 한다.
나는 이따금 내 아내가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 꼭 안아준다.
양치를 마치고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아내는 이미 잠에 들어있었다. 내가 침대 위 아내 옆자리에 나란히 눕자 그녀는 오른팔을 내 허리에 감아주었다.
4
그 건물 옥상 위로 한 여학생이 올라왔다. 자정의 까마득한 어둠을 품은 하늘에는 짙은 구름도 가득 껴서 시야에는 진한 회색만이 보였다. 어쩌면 검은색보다도 빛을 더 잘 빨아들이고, 많은 사람들을 단번에 우울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제일 진한 회색이었다. 그 회색과 오랜 시간 함께 있다 보면 지상에서 들려오는 여러 소리가 방향을 틀어 회색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회색이 빨아들일 수 있는 것은 빛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소리는 점점 아득해지고, 그 소리들이 가지는 의미도 각자로부터 멀어져 간다.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여학생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씩 살랑거렸다. 그녀는 회색 교복을 입고 있었고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구두 굽이 돌로 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어지러진 집기들 사이로 바람이 세어 나오는 소리, 아마 그녀의 귀에서는 머리카락이 서로 마찰하는 소리까지, 그것들만이 공간을 메웠다. 여학생은 옥상 가장자리로 걸어간 다음 난간을 넘어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녀의 몸이 블레이드 사인에 부딪히면서 간판의 노란 조명이 꺼져버렸고 더 아래로 내려가서는 높게 쌓여있는 주류 운반 용기 위로 떨어져 술병들이 깨졌다. 아주 큰 소리가 났다. 달랑거리던 블레이드 사인은 조금 깜빡이다가 떨어져 나가서 여학생을 깔아 뭉겠다.
진한 회색빛은 하나의 생명을 빨아들였다.
나는 주방에서 두꺼운 칼 하나를 골랐다. 그것을 내 이마 높이까지 가로로 들어 올리자 창문을 통해 들어온 태양 빛을 반사해 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눈동자를 위로 움직여서 그 영롱한 칼몸을 바라보았다. 밤이 되어서 나는 평범하게 걸어가는 그 여자를 발견했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거리를 좁힌 다음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그녀의 오른쪽 승모 부분을 찔렀다. 키가 비슷했기 때문에 그곳이 제일 찌르기 쉬운 곳이었다. 칼에 찔린 그녀의 승모는 회색의 코트 위로 묽은 피를 뿜어냈고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엎드린 그녀의 몸을 위를 바라 보도록 돌린 다음에 그 위에 올라타 상체를 계속해서 찔렀다. 불편한 자세였기 때문에 많이 찌르지는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죽기 직전에 느낀 공포와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2교시 수업이 끝난 쉬는 시간에 나는 왠지 멍한 기분이 들어 이전 두 교시의 수업 내용을 기억해 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도저히 기억해낼 수 없는 꿈을 꾸다 방금 막 일어난 상태처럼, 내 기억의 지속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동하지 않았었다. 왜 죽은 거니, 왜 뛰어내린 거니, 하고 나는 물었다. 정말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거니. 나는 그녀의 회색 교복과 검은색 머리카락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뭉치는 일 없이 항상 한 가닥 한 가닥 구분되어 움직였었다.
내가 다리 위에 섰을 때 하늘은 어둡고 이상한 청록색을 띠었다. 그리고 강한 바람에도 휘어지지 않는 거센 빗줄기가 일자로 떨어졌다. 나는 파도치는 강물 위로 빼곡한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불규칙하게 요동치게 되는 수면의 모습을 상상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그런 상상을 하면서 젖어가다 보니 나 자신이 그 수면 위로 잠깐 튀어 오른 작은 물방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존재했다가 다시 혼란 속으로 흡수되어 버릴 물방울 하나가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탄창이 꽂힌 권총을 가방에서 꺼내 장전한 다음 입에 물었다. 그리고 내 뇌수가 터져 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교실 구석에서 두 명의 여학생이 나를 번갈아 가며 때렸다. 붉어진 뺨을 후리기도 했고,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를 걷어차기도 했다. 그녀가 뛰어내렸기 때문에 내가 더 맞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평소 안 좋은 점들을 막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둘이 말을 시작하면서 나를 때리는 속도는 줄었지만 그다지 상황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중 한 명의 머리를 세로로 가르는 상상을 하였다. 피와 뇌수가 섞인 기묘한 색의 액체가 목을 통해 가슴골로 흘러내린다.
불을 끄자 암막 커튼 덕분에 이 좁은 공간에도 까마득한 어둠이 드리웠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서도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눈을 감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행동이 된 느낌이었다. 그녀의 자살에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에겐 가족이 없었고 친구도 오직 나뿐이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과 그러지 못했던 시간이 난잡하게 뒤엉키며 눈앞이 뿌예지고 아득해졌다. 암적응 되면서 잠에 드는 것은 점점 더 힘든 일이 되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왜인지 야한 꿈을 꾸었다.
진한 회색의 하늘 아래, 여학생 뒤 먼발치에는 내가 있었다. 나는 끝까지 가만히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늘과 바닥과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은 전부 비슷한 색이었어서 그 모든 것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로 아른거렸다. 앞모습이었다면 달랐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뛰어내리면서 나는 큰 소리를 들었고 바닥에서 그녀의 피와 술이 섞이는 것을 보았다.
진한 회색빛은 곧이어 소리까지 빨아들였다.
5
내가 퇴근하고 돌아온 집 안방에는 어린 여자아이처럼 생긴 요정이 있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아, 마치 내가 안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얼마간의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놀란 티조차도 내지 않았다. 고개를 가만히 고정해 놓고, 눈썹 부분 주위로 슬며시 내려앉은 앞머리 뒤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걸을 땐 그 요정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고, 내가 한 자리에 서자 요정의 시선도 참을성 있게 멈춰 섰다. 요정은 아무런 주름이나 장식이나 무늬 없이 심심한 디자인의 연한 분홍색 원피스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몸의 윤곽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한 치수였고, 어깨끈이 널찍했다. 부드러운 원단은 그 어깨끈을 통해 요정의 어깨에만 의지하고선, 침대 위나 허공 같은 공간으로 늘어졌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요정의 몸은 심심한 디자인의 연한 분홍색 원피스를 제외하면 본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 요정의 모습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처음에는 그것이 어떤 귀신이나 환각의 일종인 줄 알았다. 이 집에 깃들어있던 영혼 하나가 할 말을 전하려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나, 피곤한 내가 눈앞에 가상의 형상을 만들어낸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내가 그녀를 더욱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게 되자, 그녀가 귀신이나 환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은 어느 순간부터 톡톡 솟아올라 점점 선명해졌다.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다름이 아니라, 요정이야.’하고 그녀의 눈빛과 내려앉은 원피스가 네게 말했다.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다름이 아니라, 요정이야.’하고 그것들은 반복했다.
나는 침실 옷장을 열어 그 옷걸이에 겉옷을 걸 동안에도,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요정에게 보답하듯이, 엇비슷한 깊이의 응시의 시선을 보냈다. 적어도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눈빛에 어떤 의미나 감정을 담아내는 의사소통 방법에 그다지 능숙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으로 나는 그러한 내 한계를 인식할 수 있었다. 어느 때에도 눈빛이 변하지 않아, 속마음을 읽기가 왠지 모르게 어렵다고, 친한 사람들은 말했다. 어쨌든 지금 내 침실에 있는 그 요정은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 들었을 듯했다. 정갈한 앞머리를 해치고 내게 와 닿은 그녀의 눈빛에는, 복잡한 정보가 해독하거나 느낄 수 없는 형태로 존재했다. 무언가가 고스란히 담겨있긴 했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녀의 눈빛이 지닌 깊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 눈빛은 언제 나와 같이 평면적이었고, 그녀의 눈빛은 분명하게 특별한 요소를 여럿이 품은 채로 작게 빛나고 있었다.
“너는 누군데 내 침실에 있는 거니? 심지어 제 집처럼 침대에 걸터앉아서 말이야.”하고 나는 요정에게 말했다. 그 말에는 내가 들어도 놀랄 정도로 둔탁하고 밀도 있는 침착함이 깔려 있었다.
“그건 네가 지금 궁금해할 점이 아니야.”하고 요정은 말했다. 조숙하고 어른스러운 중학교 신입생이나 초등학교 고학년생 같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음성 어딘가에는 마치 집요한 넝쿨 식물의 뿌리처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깊이 서려 있었다. “지금은 나를 믿어. 나는 너를 해 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너 같은 어린이가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하게 더 믿음이 가네.” 나는 겉옷을 걸어둔 옷걸이를 다시 옷장 속에 넣어두고, 나는 침대 위에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그럼 너는, 어린 여자아이 요정인 거야?”
“음, 그래. 나는 요정이야.” 그녀는 말하면서 입술을 꾹 모았다. “나는 너를 도와주기 위해 여기에 왔어. 네가 이루었으면 하는 것을 말해봐.”
“정말? 나를 어떻게 도우려고 그런 말을 해? 그럼, 이 세상을 흔들어봐.”
“흔들흔들.”하고 요정이 중얼댔다. “흔들흔들거려.”
그러자 창밖에서는 바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 방향을 보자, 거리의 건물들이 일제히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물컹한 질감의 거대한 젤라틴 덩어리처럼 좌우로 크게 흔들리면서, 자신들을 매질로 한 파동을 전파했다. 건물이 한 번씩 이동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 안의 사람들은 창문을 깨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치 어린아이가 나뭇가지를 들고 개미를 이용해 놀다가 흥미가 바닥나 그냥 던져버릴 때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은 빠르게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소리 없는 건물의 흔들거림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뒤섞인 비명이 미세하게 들려왔다.
“이제 그만해. 네가 뭘 할 수 있는지는 알겠어.”
“그래,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너를 해 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몇 번의 부탁을 더 할 수 있지?”
“그건 네가 어떤 부탁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 나는 그 정도로 딱딱한 규칙을 좋아하지 않거든.”
“내가 이루었으면 하는 것은,”하고 나는 입을 땠다. “내 아내를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로 바꿔줘.”
“아내가 레즈비언이야?”하고 요정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그 눈빛과 말투가 어떤 의미인지, 나는 여전히 몰랐다.
“어, 맞아. 결혼 2년 차에 이 집으로 자신의 애인을 데려온 것을 내게 들킨 뒤로 얼마간 모습을 감추더니, 자살해 버렸어. 그 애인도 그날 이후 내 아내의 모습을 본 적이 없데.”하고 내가 말하자, 요정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전과는 다른, 알 수 없음 속의 어떤 영역 위로 살포시 안착했다. “그래도 나는 내 아내의 미소가 그리워. 어느 시점까지는 내게만 지어주던 미소였지. 그런데 그 미소를 다시 떠올려 볼 때마다, 그곳에는 어떤 그림자가 있었음을 느끼게 돼. 그 상대적인 어둠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형태로, 어딘가에 드리워 있는 거야.”
“알았어, 이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마지막 부탁이야.” 요정을 그렇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요정의 머리카락과 원피스가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였다. 내게는 느껴지지 않고, 요정이 있는 곳에서만 부는 바람이었다. 바람에도 들리지 않는 어깨끈과 바람에 가늘게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 얼굴 앞을 가려대는 머리카락 뒤에서, 요정은 나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 웃음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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