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2020 : [소울]

★★★★ : 8/10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2020년 작품, [소울]은 개봉이 예정되어 있던 당시 코로나 사태의 심화로 극장 개봉을 취소하고 즉시 디즈니 플러스 스트리밍으로 직행한 영화이다. 극장 개봉 취소에 아쉬움이 들 정도로 [소울]은 시청각적으로 훌륭하다. 또한 태어나기 이전 영혼 세계를 표현하는 몽환적인 방식은 픽사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며 그 속에서 놀라울 만한 연출력과 묵직하고 깊은 주제 의식은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린다. 한 마디로 톡톡 튀는 창의력에도 놓치지 않는 영화의 구심력으로 남녀노소 모두를 끌어들이는, 픽사의 장점이 여실 없이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개인적으로 [업](2008)과 함께 해당 작품이 픽사 에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수많은 걸작들 중 주제적으로도, 그리고 감각적으로도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를 떠나서도 해당 영화가 지닌 시청각적 장점, 그리고 전하는 감정과 인간성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느끼기 위해 영화를 꼭 관람할 것을 강하게 추천한다. 이에 이동진 평론가는 자신의 채널, 파이아키아에서 '근 10년 간의 픽사 영화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남겼다.
추가로 해당 글은 후반으로 갈수록 영화의 연출과 숨겨진 이야기들보다는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려하는 철학적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다소 함유할 것이다. 그러한 거대한 질문의 물음과 한 답의 제시가 영화 후반에서의 연출적, 구성적 특징이라 할 수도 있다. 결국 본 글은 영화가 말하는 인생 철학에 대한 논의를 풀어주고 의견을 끼얹으며 질문을 이어 제시하는 글이기에 한 번 씩 의문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감상했으면 할 따름이다.
- 이동진 | ★★★★☆
영혼, 티끌의 기쁨과 깨알의 즐거움이 쌓인 태산 같은 삶의 행복
- 허남웅 | ★★★★☆
IMDb rating : 8.0/10 (413K)
metacritic - User Reviews : 8.2/10 (842)
metacritic - Critic Reviews : 83/100 (55)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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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은 그 오프닝에서부터 그 재능을 여실 없이 보여준다. 재즈 뮤지션의 꿈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중학교 밴드 선생의 삶으로 연명하는 주인공, 조 가드너가 평소 자신의 우상인 유명 연주가 도르티야 윌리엄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선보이는 장면이다. 재능을 인정받은 수많은 사람들, 예를 들어 배우, 운동 선수 그리고 특히 예술가는 자신의 일에 집중할 때 소위 말하는 무아지경에 빠진다고 한다. 그 때는 자신 주변의 보든 사람과 배경이 희미해지고 오직 악기와 함께 영혼이 어디론가 날라가 버린 느낌이 든다. 이 과정도 그 당시에는 인지할 새도 없지만 나중에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느껴지는 그 것을 영화는 그대로 보여준다.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하다 마치 마법 같은 뿌연 물감에 휩싸여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되는 그 느낌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이 장면이 훌륭한 이유는 단순히 시각적 연출의 독창성과 확실한 방향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의 연주는 음악을 듣는 안목이 없는 작가도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빠져들게 한다. 서정적인 색을 잃지 않으면서 조의 피아노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는 동시에 비극적인 색이 숨어있는 느낌이다. 또한 해당 장면에서의 보라색과 푸른색의 색감적 태마와 무아지경이라는 소재는 이후 영화가 이어갈 영적 세계와의 연결에 대한 복선을 설치한다. 이외에도 영화가 러닝타임 동안 이어갈 다양한 연출적 시도인 관객을 조 가드너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전달력의 강화를 강렬하게 시작한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이 장면은 조의 재능과 열정이 담긴 연주를 아름답게 표현하며 설득함과 동시에 시청각적으로, 그리고 연출적으로 영화의 배경을 이어나갈 힘을 얻는, 오프닝으로서 최선이라 할만한 명장면이다.

이후 조가 맨홀에 빠져 영혼 상태로 들어온 'Great Beyond', 사후 세계 에서 탈출하고 진입한 태어나기 전 영혼들이 있는 'Great Beyond'의 시각 연출은 현대적이며 창의적인 표현으로 빗어낸 예술에 가깝다. 앞서 말한 색감적 태마인 보라색과 푸른색을 잔디와 나무와 같은 초록빛 자연물에 담음으로써 현실과 대비되는 특별한 이질감을 표현한다. 이와 동시에 아기 같은 영혼들과 함께 정겨운 시골집의 뒷동산 같은 언덕들은 무의식적인 편안함과 친근함을 심어준다. 그림에서도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성격 형성 건물들은 경계가 흐린 비누 같은 질감으로 형태를 빠르게 바꾸며 마치 초자연적 현상 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과 끝없이 펼쳐진 듯 하면서 보라빛 안개로 멀리까지 보지 못하도록 막는 푸근한 색감의 몽환적인 하늘과 동글동글한 영혼들은 마치 꿈과 같은 세계를 환상적으로 조립해낸다.

Great Beyond, 다른 말로 유세미나라 불리는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표현함에 있어 [소울]은 단순히 정석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서 그만두지 않는다. 해당 장소를 담은 장면에서는 배경 음악으로 주로 전자음악의 특징이 드러나는 앰비언트 뮤직 장르를 적극 활용하여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는 평을 받았다. 이는 피아노와 재즈를 기반으로 한 현실세계의 배경음악과 대조되며 그 전체적인 분위기의 변화를 강조하는 효과도 있다. 또 자신을 온 우주의 양자화된 장의 총체라 설명하는 제리들도 현대예술의 가장 특징적인 성과들을 동원해 간결한 도형들로만 표현함으로서 영화의 세련된 매력을 더했다. 기본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제리들은 자유분방하게 형태를 바꿔가며 자기자신과 겹쳐질 때의 변칙적인 시각효과와 함께 영화의 현대적인 개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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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이 훌륭한 애니메이션인 이유도 여기서 나온다. [소울]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작가도 현재 이야기와 주제가 해당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 믿는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대해 관객들이 기대한 바를 얼마나 충족 시켰는지의 관점에서도 [소울]은 충분히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 작가는 애니메이션, 그중 여러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3D 애니메이션의 영상 매체 예술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데에는
'애니메이션만이 시도할 수 있는 연출을 얼마나 성공 시켰는가'
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쉽게 말해 실사화하기 어려운 애니메이션이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는 뜻이다. 실사 영화와 완전히 같은 목표와 연출적 시도들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감정의 전달이라는 관점에서 실사 영화를 뛰어넘기 어려우므로 애니메이션이라는 영상의 선택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만이 이룰 수 있는 성과가 포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업](2008) 은 해당 방향성이 후술할 몇몇 작품들보다는 뚜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이러한 관점에서의 높은 평가를 기대할 수 있다. 인물과 사물을 사각형과 원에 대응시켜 의미를 담아내는 상징은 영화의 중요한 흐름을 담당하고 이처럼 단순히 디자인된 인물들과 배경 디자인의 사실성을 대비함으로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소울]로 돌아와 이러한 관점에서 [소울]은 유 세미나의 풍경을 비롯해 제리들과 영적 세계와 관련한 요소들을 표현할 때 포근함과 현실에서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동시에 주는 색감과 텍스쳐를 사용해 효과적인 전달을 이루어 냈다.

이러한 시도를 담은 [소울]은 이전까지의 픽사의 행보에 반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만한 과감한 작품이었다. [토이스토리]와 함께 3D 애니메이션 장르의 포문을 연 픽사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사의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최대한 현실적인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삼은 듯 이를 이루기 위한 수많은 기법을 도입했다. 이러한 발전이 성장이라 보는 관점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현실과 가까운 표현만을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특장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러한 관점에 탑승해 기존의 극사실주의를 거부하고 3D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가는 작품이 늘어나는 추세라 마음에 든다. 대표적으로 코믹스적인 표현을 적극 활용한 소니의 [스파이더맨 : 스파이더버스](2018) 시리즈가 있다. '카툰 렌더링'이라는 3D 애니메이션 기법을 처음으로 대형 영화에 적용하여 해당 분야에서 새로운 혁신을 이끌어 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해당 영화의 기술적 영향력으로 탄생한 넷플릭스와 라이엇 게임즈의 [아케인](2021)은 이러한 연출적 특징을 더욱 강화해 얻은 독창적인 색채감과 함께 탄탄한 스토리로 최고의 애니메이션의 위치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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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는 멘토로서 수천 년 간 태어나지 않은 영혼, 22를 만난다. 영혼의 번호는 인류 문명이 지속된 시기 동안 태어난 총 인간의 수로 추측할 수 있으며 제리가 소개한 한 영혼의 번호는 1082억 1012만 1415 인 것으로 보아 22는 꽤 초반부터 유 세미나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멘토는 영혼이 태어나기 위한 조건 중 영감(spark)을 찾아주는 역할을 하고 22는 그 긴 기간 동안 스파크를 얻지 못한 것이다.
여담으로 제리가 유 세미나로 진입한 조를 가지고 노는 영혼들을 부를 때 37번이라는 번호가 등장한 것을 보고 22와 같은 오래된 영혼이 꽤 많이 존재한다는 추측이 등장했다. 그러나 1000억 단위의 숫자를 공식 행사가 아닌 곳에서 매번 말하기에는 번거롭다는 점과 한 제리가 한 번에 관리하는 영혼의 수가 10명 남짓인 것으로 보아 아마 긴 번호의 마지막 두 숫자를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37번은 다른 어린 영혼들과 같은 행동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도 22와 같은 오래된 영혼이라는 요소는 22의 설정과 가치관이 유니크함과 설득력을 사실상 지워버리는 것이기에 공식 의견이라 보기에는 어색함이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 22와 조는 삶이라는 기준 내에서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2는 한 번도 지구에 발을 들인 적이 없으면서 지구에서의 삶이 한심하다 하고 조는 한번의 인생을 살고 온 사람으로서 다시 그 삶으로 돌아가려 애쓴다. 이를 통해 영화는 삶에 대한 열정과 지혜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논하려 한다. 22는 수 천 년 간 인류가 배출한 수많은 위인과 지식인들을 멘토로 만나고 여러 가르침을 받았지만 자신의 삶을 바꾸고 나아가려는 열정이 없다. 이에 반해 조는 언제나 살아가겠다는 열정이 가득하나 이를 현실로 이루어 나갈 지혜가 부족한 것처럼 묘사된다. 이러한 둘의 삶에 대한 태도와, 더 나아가 이들이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개념의 대비는 재즈 뮤지션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만 하는 조의 인생을 보고 난 22의 대사를 통해 직접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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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문윈드를 만나 몸으로 돌아왔으나 22가 조는 몸에, 조의 영혼은 고양이의 몸에 깃든 상태에서 뉴욕의 거리로 나온 22를 통해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한 번도 인간의 삶을 경험한 적 없는 22는 주위의 여러 소음에 겁을 먹는다. 우리의 기본적인 영혼은 이러한 일상적인 자극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모든 소음이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반복된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에 대해 너무 무뎌지고 나 자신을 돌본다는 생각조차 안 하고 지내는 것이 아닐지 영화는 물어본다. 소음을 예로 들어 그렇지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무언가, 반대로 행복을 주는 무언가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무시해도 될지는 생각해 볼만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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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집에 도착한 조와 22에게 그가 일하던 중학교 밴드부에서 유일하게 열정을 가지고 연주하던 코니가 주기적으로 받던 레슨을 위해 찾아온다. 그러나 갑자기 그만둔다는 말을 하고는 조의 몸에 깃든 22가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자 마지막으로 연주를 보여주겠다 한다. 코니의 연주에 22는 감탄하고 그녀는 역시 그만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며 집으로 돌아가자 조는 연주가 그녀의 스파크이니 당연하다고 이야기한다. 또 도르티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간 단골 바버샵의 주인인 데즈를 만난다. 조는 그의 스파크가 미용이라 믿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수의사가 되려 했으나 딸이 아파 학비가 싼 미용학교로 진학한 것이었다.
데즈: 수의사가 되고 싶었지.
22(조): 근데 왜 안 했어?
데즈: 해군 제대하고 하려고 했는데 딸이 아팠고 미용 학교 학비가 수의 학교보다 쌌거든.
22(조): 안됐네. 꼼짝없이 이발사로 불행하게 살아야 하니.
데즈: 오우, 넘겨집지 마. 무진장 행복하니까. 모두가 역사에 남을 위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중략) 내가 위인은 못 돼도 여럿 사람 만들 수는 있지.
이때까지 영화는 인물들과 관객이 스파크를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나 끝까지 이루어나갈 꿈이라 인식하도록 한다. 맨토들에게 제리가 보여주는 선전은 지구로 가가 위해 필요한 필수 조건이라는 듯 말하고 영혼들이 모든 것의 전당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스파크를 얻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2가 처음으로 좋은 대면을 한 사람인 코니는 연주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강조하며 스파크가 잘 실현된 사람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 스파크만을 얻지 못한 22가 인생을 전부 다 아는 척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의 조명이라 해석하도록 하는 것에도 '스파크'라는 개념적 설정에 할당된 중요한 의미가 강조된다. 이러한 해석을 희석 시키지 않고 등장한 데즈의 대사는 마치 꿈과 목적을 이루는 것이 행복을 향한 길이 아님을 나타낸다고 받아들여진다. 또는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한, 즉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한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스파크가 한 영혼의 목적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정리하자면, 스파크는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이야기하는 22를 비판하는 요소로서 그녀가 유일하게 얻지 못한 스파크가 태어날 때 가장 중요한, 인생의 목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데즈의 말을 통해 영화는 인생의 목적과 같은 원대한 성과의 실현이 행복을 위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혹은 이와 비슷하게 행복한 인생을 사는 데즈가 그의 절친인 조가 알지 못한 목표를 과거에 쫓았었다는 사실은 스파크가 가진다고 여겨진 그러한 의미마저 부정한다 할 수 있다. 코니의 연주, 데즈의 수의사 생활, 혹은 미용은 그 개인이 날 때부터 지니던 목적이 아닌 살아가며 행복을 찾는 과정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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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중 양복이 망가져 수선을 위해 어머니를 찾아간 22와 조는 여전히 연주자로서의 삶을 탐탁치 않아하는 그녀와 진지한 대화를 시도한다.

어머니: 네가 연주를 즐기는 거 알아
조: 그럼 왜 내가 연주하지 않을 때 가장 행복하세요? 최고의 기회를 잡았는데 화만 내시잖아요.
어머니: 넌 네 아빠가 음악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너도 그런 고생하는 게 싫어.
조: 아빠는 꿈을 좇았는데 전 왜 안 되죠?
어머니: 네 아빠는 내가 있었어. 이 가게 덕에 먹고 살았지. 내가 죽고 나면 넌 어떡할 건데?
조: 음악이 제 전부에요.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어머니: 꿈이 밥 먹여주진 않아, 조이
조: 그럼 안 먹을래요. 음악은 저한태 직업이 아니라 제 삶의 이유예요. 아빠도 그랬고요.
두려워요, 만약 오늘 죽는다면 무의미한 인생일까 봐
해당 대화는 여전히 [소울]이 꿈과 인생의 의미를 결정 짓는 무언가를 향한 갈망이라는 주제를 이어가고 있음을 보인다. 사실 앞서 데즈에서 언급한 스파크에 대해 영화가 이전과 다른 시선을 보내는 장면은 기본적으로 이 대화 만큼이나 크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해당 대화를 통해 궁극적 목표에 해당하는 꿈이라는 개념을 최고치로 강조한 후 나중에 이를 부정하는 진실로서 데즈가 말한 인생에서의 꿈이 가지는 역할을 복선으로 둔 주제를 전달한다는 구조이다. 이런 식으로 적어 놓으니 뻔한 듯하면서도 영화를 관람하는 입장에서는 해당 대화가 영화가 말하려는 주제같이 느껴지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강력하게 연출되니 수차례 관람한 게 아니라면 해당 변주를 꽤 충격적으로 받아들일만 하다.
고양이의 몸을 가진 조의 영혼이 22에게 자신의 말을 따라하라 한 뒤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이다. 고양이가 말하는 조의 목소리가 화면이 전환되며 남이 느끼는 22가 말하는 조의 목소리로 바뀌는 것이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조의 모습으로는 몇몇 위기만 모면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비추지 않은 그가 어머니 앞에서 전하지 못한 진심을 처음으로 드러나는 느낌도 든다. 또 앞 부분에서 언급한 영화가 시도하는 조와 관객의 일치가 다시 한 번 느껴지는 연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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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조와 22는 드디어 때가 되어 문윈드를 찾아가 몸을 바꿀 준비를 한다. 그러나 22는 자신이 조의 몸에서 삶을 살며 수 천 년 간 얻지 못한 스파크에 가까워진 느낌이라며 좀 더 살아보겠다고 한다. 이에 조는 삶을 좋아하게 된 것이 자신의 몸으로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얻은 그의 기억들 때문이라고만 말한다.


조: 그건 목적이 아냐, 22. 그건 그냥 사는 거지 (regular old living).
22는 앞서 언급한 듯 조와 대비되는 인물로서 이전까지 영화가 주로 강조해온 주제의식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없음을 찾아냈다고 표현할 수 있다. 22가 느낀 그 스파크란 사람으로 살아가며 평생을 좇을 꿈이 아닌 한 존재로서 자신과 주변을 즐길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아이 때 아버지와 길을 걸어다닌 추억, 커서 자식과 보내는 행복한 시간, 그리고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빙글빙글 돌며 내려온 단풍 나무 씨앗 하나에 '사는 삶'을 느낄 수 있다면 그 것이 스파크인 것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인물들은 스파크를 목적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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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터 영화는 해당 주제를 강조하는 수 많은 장면을 동원해 강하게, 그러나 감성적으로 역설한다.
조는 원래 Great Beyond 로 가야 했으나 탈출한 것이므로 영혼의 수를 관리하는 테리에게 잡혀 결국 지구 통행증을 얻은, 즉 스파크가 생긴 22와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사후세계로 갈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계속 스파크가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 말하는 조에게 22는 통행증을 던지고 떠나간다. 일전 영혼세계에서는 감각이 작동하지 않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설정이 드러난 적이 있다. 그러나 22가 던진 지구 통행증을 느낀 조는 그 세계에서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잃어 버린 22를 상징하는 요소이다.
그리고 22의 스파크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조에게 제리는 이렇게 답한다.

제리: 뭐라고요?
조: 있잖아요, 불꽃(spark). 목적요, 음악이었나요? 생물학, 아님 걷기?
제리: 그건 정해주지 않아요. 왜 그런 생각을 했죠?
조: 피아노가 내 운명이고 내 불꽃이거든요.
제리: 불꽃은 영혼의 목적이 아니에요. 멘토들은 다 왜 그러는지. 목적, 삶의 의미... 단순하긴
이 대화는 이전부터 영화가 진짜로 말하려는 스파크의 근본을 제리가 직접 전달해주는 장면이다. 앞서 말하기도 했지만 스파크가 인생의 목적을 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소울] 한 번 시청하는 관객에게 영화가 이끌어내는 결론만큼의 강조를 받아오지 못했다. 오히려 나중에 등장한 22의 단풍 나무 장면은 이전의 어머니와의 대화씬과 충돌하는 경향을 보이며 혼란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 제리의 대사는 이러한 관점의 배치가 의도된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그러한 대조로 인물이 느낀 충격과 부정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성과를 이끌어 냈다. 다시 한 번 대조되는 주제의 이어진 강조와 이를 표현하는 이전의 연출들을 통해 제리의 말을 들은 조가 느끼는 감정을, 평생을 자신의 꿈을 위해 살아왔던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충격을, 강하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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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는 22가 던진 지구 통행증으로 테리에게 영혼을 빼앗겨 기절해 있는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 공연을 성공시킨다. 그의 우상이었던 도르티야도 아주 드물게 나올 훌륭한 공연이라 칭찬하고 어머니마저 환호하며 그의 꿈을 응원해준다. 그러나 조는 아직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것을 느낀다. 그가 영화 내내 바라던 그 위대한 꿈을 이루어냈어도, 그 순간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즐겼음에도 새로운 공허함이 그를 가득 채웠다.

조: 다음은 뭐죠?
도르티야: 내일 밤 다시 와서 또 하는 거지. ...
왜 그러지, 선생?
조: 평생 오늘만을 기다는데... 상상하던 기분과 좀 달라서요.
도르티야: 한 물고기 이야기를 들려주지.
그는 늙은 물고기에게 헤엄쳐가서 말했어. "바다라고 하는 곳을 찾고 있어요."
"바다?" 늙은 물고기가 말했지. "네가 있는 곳이 바다란다."
어린 물고기가 말했네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저는 바다를 원한다고요."
내일 만나지.
도르티야의 마지막 대사는 여러 방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바다를 조의 꿈이라 할 수 있다. 조는 도르티야와 함께하는 연주가 자신 인생의 목적이자 이룬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버킷리스트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이 실제로 일어나자 그는 실망한 모습을 보인다. 어떤 확실한 목표는 그만한 동기가 있는 사람을 끝없이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꿈이 살아갈 연료가 될 수 있는 시기는 그 것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끝난다. 이 때 꿈을 이룬 사람은 다른 꿈을 찾거나 혹은 이루어진 이상을 더 이상 이상이 아닌 주어진 현실로 보고 온전히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바다를 찾았어도 바다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물에 있는 기분이 드는 조가 그 물고기라 할 수 있다.
인생과 영혼을 걸어 도달한 그 꿈에서 이를 상회하는 목표를 찾을 수 없던 조는 또 그 꿈이 너무나도 멀었던 탓에 성취 이후의 삶에 대한 준비가 충분치 않았다. 마음의 준비와 내면의 합의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일자리는 잘 찾아오지도 않고 실제로 겪어보기 전까지는 자신의 꿈이 그 것인지 알 수도 없다. 사람은 꿈을 이루지 못 할 때 이를 일종의 우상으로 만들어 노력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성장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리 재미있는 취미이더라도 그 것이 직업이 되었을 때는 흥미가 떨어진다는 이야기와 조금은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이 때 도르티야는 직업이 된 그 것도 즐길 수 있는 소수, 자신에게 최고의 일자리를 구한 소수라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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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관점에서 이미 조는 바다에 있었을 수 있다. 도르티야의 이야기에서 늙은 물고기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바다는 조가 막 도달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 바다는 꿈보다 더 넓은 개념, 이를테면 삶의 이유와 행복의 근본적인 발생이라 해석한다. 즉, 바다란 조가 꿈을 이루었어도 이전처럼 진정으로 느끼지 못한, 그러나 언제나 그와 함께할 수 있었던 일상이다. 정확히 말하면 언제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망각해 잃은 지도 몰랐던 일상을 즐기는 능력이자 태도이다. 조가 자신의 큰 꿈을 향해 달려간 노력은 도착해서도 이를 즐기지 못하도록 가장 중요한 일상의 의미마저 태워버린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르티야가 수 년을 연주자로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으로 연주자라는 직업 자체를 즐기기보다 사실 일상의 소중함을 한 번 깨달은 사람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맥락 상 자연스럽다. 작은 물고기 입장에서 자신이 항상 존재해온 일상(물)이 사실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바다)이라는 것을 이야기는 말한다. 이야기의 해석 밑 도르티야로 투영되는 인간의 한 단면이 주제와 이어지는 방식을 생각해볼 때 첫 번째 해석보다는 해당 관점이 조금은 더 정확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제리의 말처럼 영혼의 스파크는 '연주', '이발' 같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닌 삶 그 자체를 즐길 준비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요소이다. 조가 어머니에게 말한 "두려워요, 만약 오늘 죽는다면 무의미한 인생일까 봐 " 즉,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무의미한 인생은 위 바다에 대한 관점에서 반박된다. 꿈을 이루든, 그러지 못하든 그는 언제나 바다에 있었고 도르티야와의 대화에서는 그 사실을 인지했다는 것에만 변화가 있는 것이다.
조: 그건 목적이 아냐, 22. 그건 그냥 사는 거지 (regular old living).
에서 이 둘의 대사 간에서 이러한 관점과 연결되는 부분이 등장한다. 22가 말한 하늘 보기와 걷기는 조가 말한 '그냥 사는 것' 으로서 삶의 의미를 담아낸다. 그러나 스파크는 위 관점에서 한 사소한 일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에 22가 말하는 어떤 행동보다는 가까우므로 조금의 차이가 있다. 즉 재구성한다면 해당 관점을
라 대화를 이어 붙여 설명할 수 있다.

도르티야의 말을 듣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는 조는 이러한 식의 삶이 앞에 있는 전철의 사람과는 무엇이 다를지 생각해본다. 일전 22가 지하철에서 화내는 사람을 보고 겁을 먹자 조는 '피곤해지지, 매일 똑같거든. 밤이고 낮이고' 라 말한다. 조가 간과한 것은 도르티야의 벤드에서 연주하는 것이 그가 항상 살아왔던 삶의 위치를 바라보는 태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다른 모든 행복의 수단들을 제쳐두고 이룬 꿈은 그 것을 이루기 전의 삶에 대한 절박함을 자연스레 없에 오히려 그를 저들과 같은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조는 전철 유리를 거울 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흔히 문학 작품에서 거울이 자아 성찰을 나타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도 이를 통해 이전까지의, 그리고 지금 그의 상태를 확인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는 앞서 말했듯 꿈을 이루었어도 그 꿈 속을 살아가는, 즉 연주하는 시간 외에는 어떤 목표나 동기를 느끼지 못했으며 이 것이 그 꿈의 의미마저 퇴색시킨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런 모습을 나타내는 듯 유리에 비친 조는 어두운 배경에 홀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조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들을 눌러본다. 그러다 22가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닌 여러 물건들을 발견하고 무언가를 깨닫는 조. 악보를 치우고 물건들을 놓고 연주하자 22의 경험이 보였다. 맛있던 피자의 크러스트, 베이글 조각, 데즈가 준 사탕, 어머니가 쓰던 실타래, 그리고 손 위에 안착했던 단풍 씨앗. 그 것들이 곧 그녀의 스파크였다.
그리고 그는 살면서 일어난 여러 순간들을 기억해낸다. 도르티야와의 성공적인 첫 공연이 아닌 나뭇잎이 만든 햇살 무늬를 맞으며 타는 자전거, 비 오는 날 식당에서 혼자 먹는 호두 파이 같은 것들을 말이다. 아버지가 어릴 적 들려준 음반, 아름다운 폭죽 놀이에 자연스레 벌어지는 입, 벤드 학생에게 소개해주는 위대한 재즈 뮤지션, 이젠 늙은 아버지께 들려드리는 피아노 연주, 발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파도를 같이 느끼는 어머니, 전철에서 지는 석양을 보고 한 번 지어본 미소. 그 모든 것들이 진짜 그의 삶이었다. 모든 꿈을 이루어도 채우지 못했던 그의 진짜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