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단평
1. 극장판 짱구는 못 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
2. 천공의 성 라퓨타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될 가능성이 높다.
한 영화에 대한 긴 글만 쓰려니 부담감에 이어나가기도 어려워 시작한 활동.
몇몇 영화는 확장되어 별도의 글로 작성될 수 있다.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 (2008)

★★★☆ : 7/10
인생이란 자전거를 타고, 향수의 냄새에
中 히로시의 회상
[어른 제국의 역습]은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영화관에 입장한 대부분의 부모들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깊은 주제 의식과 서정적인 연출력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놀라울 만큼 뭉클한 감동을 전달한다. 가장 중요한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신형만의 과거 회상 장면일 것이다. 회상 전후를 포함한 해당 신 전체가 아름다운 추억 본연의 모습과 그 이면에 도사리는 현재의 책임 회피라는 영화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품고 있다. 이를 카메라 구성과 앵글에 녹여 내고 관객에게 전달하는 자신감과 솜씨는 다른 실사 명작 영화들 못지않다.
장면은 짱구가 EXPO70이라 적혀있는 철문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영화의 시작부터 대전 엑스포의 모습을 보여줬으며 이가 어른들을 홀리려는 세트라는 사실은 이미 작중 해당 장면 이전에 대사를 통해 밝혀진다. 그 상황에서 작은 철문 안에서 관리되는 엑스포가 어른들의 추억이자, 동시에 빌런의 가장 유용한 도구로서 비춰진다.
본격적으로 짱구가 엑스포장으로 들어오자 그 안에는 어린 시절 모습을 한 형만이 있다. 3시간을 기다리고도 월석을 보고 싶다는 형만의 영락없는 어린 모습이 우리들의 마음을 녹인다. 짱구가 어린 형만에게 다가가자 형만의 부모가 미소와 함께 서서히 물러나는 모습은 직전까지의 어린 형만의 세계와, 짱구가 원래 살아가는 세계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처음으로 허무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형만의 부모로 비춰지는 사람이 배우같은 현실의 존재가 아니며, 이어서 그 세계 전체가 누군가의 정신 속 상상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세계 속 존재는 주인의 아들을 감지하자마자 주인에게 이제 그만 깨어나라고 말하듯이 미소를 짓고 조용히 자리를 비워준다. 영화의 공기를 추상적으로 전환하는 데에 있어 얼마나 아름답고 시적인 방법을 사용했는지 보이는가.
짱구와의 실랑이 끝에 발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 시작하는 형만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번뜩 깨어나지 않고 천천히 잠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회상을 마치고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도 오열할 뿐 어떤 환상에서 깨어나는 듯한 모습은 일절 담지 않는다. 현재의 방식으로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배치한 것은 ‘추억’ 그 자체의 근본적인 특성을 담아내기 위한 정교하고도 직관적인 탁월한 연출이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계기가 있어도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긴 이야기를 이루는 모든 일들이 한순간에 번뜩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꿈에 천천히 빠져들 때처럼 그 빛깔, 그 공기, 그 소리... 하나하나가 천천히 서로를 감싸며 머릿속에 만들어진다. 그렇게 형성된 푸근한 하나의 기억은, 공들인 시간에 비례해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따뜻함을 부풀려간다.
회상 자체에 대해서는 음악, 화면 구성, 색채감, 배치까지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느낌만 든다. 화면은 한 남자아이가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을 하나 보여줄 뿐인데, 그 일반적이고 모두가 기대하는 삶이 얼마나 어렵게 성취한 것인지, 동시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느낄 수 있다. [업]의 ‘픽사 최고의 5분’이라 불리는 오프닝 시퀀스가 생각나게 한다. 본론으로 돌아와, 처음에 자신의 아버지와 타던 자전거를 마지막에 다시 한번 타고,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어 아이들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 압권이다. 이 수미상관은 ‘가족’이라는 선순환이 창출하는 가장 현실적인 미학을 너무나도 애틋하게 우려낸다.
해당 회상 시퀀스는 작중 빌런에 저항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신발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다. 영화에서 빌런은 21세기에 지쳐 모든 것이 평화로웠던 과거에 머무르고, 그 체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생각한다. 이에 대해 신형만의 발냄새는 21세기의 아버지로 살아감에 있어 짊어지는 의무와 노고를, 동시에 자녀들과 동심을 찾아 놀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자 연결다리를 상징한다. 신형만은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어려움을, 또 이를 통해 지켜내는 거대한 행복을, 한 손에 쥐고 세상을 멈춰버리려는 세력에 저항한다.
그 여운은, 신형만이 어른의 모습으로 울면서 깨어나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형만이 누워있던 장소는 대전 엑스포장이 미니어처의 형태로 구현된 세트장이다. 과거에는 너무나도 소중했던 장소가 현재의 가족 앞에서 그 근본이 얼마나 초라할 수 있는지 조용히 보여준다. 풀백(Pull-back)되는 앵글에 담긴 엑스포장의 건물 하나가 짱구의 키보다도 작다. 쪼그라든 미니어처 세트장을 비정하게 비추며, 발냄새에서 세월의 흐름의 진정한 가치를 느낀 신형만을 통해 카메라는 관객에게 묻고 있다. 가족들을 앞에 두고도 그대의 노고가 아직 보답받지 못했다 말할 것이냐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냐고.
[천공의 성 라퓨타] (1986)

★★★★ : 8/10
순진한 색깔속, 눈앞에서 가로지르는 싱싱한 환상 세계의 구름위 항해사들. 미학부터 철학까지, 에니메이션의 가장 세심하면서도 거대한 성과!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후 1986년, 미야자키 하야오는 두 번째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천공의 성 라퓨타]를 발표한다. 영화 평론가 박평식이 최고점인 9/10을 부여했다는 사실로 해당 영화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관람해보니 86년 작이라고는 상상 못 할 높은 서사적, 기술적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활공 장면들을 포함해 스크린에 담긴 신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개성적인 에너지와 싱싱함을 품고 있다. 오프닝에서부터 엔딩까지, 장면장면 알맞은 음악을 삽입해 몰입감을 더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효과를 확실히 누렸다. 서사 구조의 풍부함과 다채로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를 넘나드는 철학적인 주제 의식은 이 모든 장점을 하나로 끌어모은다. 보다보면 어느세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도라 해적단에 쫓겨 결국 비행선 밖으로 추락하는 시타가 구름에 가려지며 등장하는 고전적인 풍의 프롤로그 시퀀스(Prologue Sequence)가 인상적이다. 해당 시퀀스의 특징적인 그림체를 통해 먼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동시에 영화의 세계관 내에서 ‘비행’이라는 소재가 차지하는 위치를 체감시킨다. 산업 혁명 초기를 떠올리는 스팀펑크 기술과 이에 비교해 훨씬 진보한 비행 기술을 교차로 그려내면서 말이다. 이와 결합해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습은 현재 보여주는 이야기가 여전히 먼 과거의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후 시타가 맨 목걸이의 비행석이 빛을 발하자 이 푸른 섬광은 어두운 파란색의 배경과 명도의 대비를 일으키며 단숨에 눈을 사로잡는다. 관객들은 낙하를 느리게 만든 비행석과 바로 직전에 본 프롤로그를 연관키며 그 영롱한 빛이 어떤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하게 된다.
이후 파즈의 집에서 깨어난 시타가 그로부터 라퓨타에 대해 설명을 듣는 장면은 시청각을 이용해 감정과 이야기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완벽하고도 탁월한 애니메이션 최고의 성과이다. 우선 이전보다 피치가 높은 음악을 사용해 마치 초자연적 존재를 스쳐 지나갔을 때의 비현실적이고, 신선한 꿈을 꾸었을 때의 낭만적인, 그 느낌을 극대화한다.

먹구름을 뚫어낸 파즈의 아버지가 발견한 것은 무수한 구름의 줄기가 사방에서 뻗은 채 빠르게 움직이는 장관이었다. 위 그림에서 보이듯 구름 한 덩어리에 많아야 한두 가지의 색을 사용해 단순함에도 아주 아름답다. 폭풍우를 마침내 이겨낸 자에게 ‘활공’이 건네는 아름다운 선물이자 위로이고 동시에 공포를 담아낸 경고 같기도 하다. 여전히 빠른 바람과 지상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은, 다시 한번 우리 뇌리속에 핵심 소재인 ‘활공’을 각인시켜 넣는다. 그 바람들의 흐름 속에서 포착해 낸 라퓨타의 마법과도 같은 실루엣까지, 정말로 예술적인 신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살펴볼 장면은 로봇 병정의 폭주로 군 요새가 쑥대밭이 되고, 파즈가 혼란을 틈타 도라 해적단과 협력해 시타를 구출하는 장면이다. 로봇 병정은 단순한 디자인에도 원리를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으로 ‘고대 문명’이라는 중심 소재를 정확히 전달한다. 주공격 무기가 고전적인 화기가 아닌 고출력 레이저의 일종으로 묘사되는 부분도 흥미롭다. 현재 인간의 것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도 아무리 멀리 떨어진 표적이라도 순식간에 불태워버리는 모습으로 폭력의 즉각성과 불가역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주위 요새를 보이는 대로 날려버리는 로봇 병정을 행해 그만하라 애원하는 시타의 모습이 마치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는 방법이 더 큰 파괴가 아니라 말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어지는 파즈의 비행과 구출 장면은 2D 애니메이션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속도감과 긴장감을 선사한다. 시각적으로는 솟구치는 물줄기와 불꽃, 불길 속의 로봇 병정과 흰옷을 입은 시타, 공기 중을 ‘활공’하는 파즈와 도라 할머니까지, 화면을 메우는 그들만의 구조와 균형감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리고 라퓨타에 도착하기까지 러닝타임 약 20분간 도라 해적단에 합류한 시타/파즈와 무스카를 필두로 하는 군부대 간의 레이스를 전부 공중에서 보여준다. 이때 비행선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마치 잠수정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묘사되어 ‘구름 위 항해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시타와 파즈가 도착한 라퓨타의 중심에는 정원과 거대한 나무가 있었고 로봇 병정들이 인간이 떠나간 후 수백 년 동안 이를 가꾸고 있었다. 이 둘을 정원까지 안내해준 로봇 병정은 시타에게 꽃을 한 송이 건넨다. 일전 군 요새에선 무차별적으로 파괴를 저지르던 존재가 정원에서 소녀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는 장면은 여러 가지를 상징한다. 우선 자연을 상징하는 정원과 꽃,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연결다리이자 대비되는 인공물을 상징하는 로봇 병정을 배합해 놓았다. 그러나 해당 장면에서의 로봇 병정을 완전한 인공물의 상징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 군 요새에서의 병정과 정원에서의 그것이 가진 동기와 풍기는 분위기가 강력하게 대비된다. 이는 요새에서의 병정의 흑화는 선제 공격, 즉 인간의 폭력에 의한 결과이며 본래 모습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영화의 주제로 이어진다. 쇳 덩어리로 만들어진 로봇 병정이 아이들에게 꽃을 건네는, 평화롭고도 애틋한 장면은 게임 마인크래프트의 철골렘이 아이템 장미꽃을 드롭하는 설정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과 거의 동시에 라퓨타에 도착한 무스카는 속내를 드러내고 시타를 납치해 라퓨타의 고대 기술을 군사 목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로봇 병정들을 조종해 라퓨타까지 타고 온 비행선을 파괴하고 그 속의 군인들을 몰살한다. 라퓨타를 이용해 수천 년 전처럼, 세계 위 떠있는 공포의 제국을 강림시키려는 무스카에게 시타는 말한다.
그녀의 말은 더욱 강력해지기 위해 지상을 벗어나 라퓨타를 짓고 여러 무기를 단 인간들의 행동을 비판한다. 라퓨타에 덕지덕지 붙은 인간들의 흔적은 자연을 거슬러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의미 없는 바벨탑의 여러 모습들 중 하나일 뿐이다. 시타와 파즈는 라퓨타를 이러한 인간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멸망의 주문, ‘바루스’를 외운다. 그렇게 라퓨타는 인간들이 남긴 잔여물을 털어내고 거대한 세계수와 그 뿌리에 안긴 정원만을 남긴 채 높은 하늘 위로 떠오른다. 인공적으로 지어진 무기들이 떨어지고 도라 해적단과 아이들이 비행선을 타고 날아가면서, 미야자키는 인간의 몸이 발붙이고 있어야 할 땅과 인간의 자유가 활공해야 할 하늘을 동시에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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