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도 제 28회 전국정지용청소년문학상 산문 부문 고등부 동상 수상작 - [노을이 질 때]

2026년도 제 28회 전국정지용청소년문학상 산문 부문 고등부 동상 수상작 - [노을이 질 때]

2025년 9-10월에 걸쳐 [우리들]의 앞부분을 KSA 백일장에 제출한 뒤로 11월 중순, 새로운 중편을 구상했다. 그러나 그 중편은 실재 작품 작성으로는 이어지지 않았고, 그 해 12월에 거의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던 [우리들]을 마저 썼다. [노을이 질 때]는 보류 상태로 남아있는 그 중편과는 별개로, 2026년 1월에 들어 쓴 단편이다. 사실은 새로운 중편을 시작할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예상보다 적은 분량에서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 나와 단편으로 따로 떼어낸 작품이다. 그 뒤로 쭉 이어서 쓴 중편은 현재 200자 원고지 600매 분량을 넘어 장편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작품 또한 나중에 다듬는 과정을 거쳐 공모에 넣어볼 생각이 있다.

정지용청소년문학상을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중,고등학교 재학생 및 동일 연령 청소년만을 대상으로 받는 응모에 참가하는 것이 의미 있는 선택일 것 같아 청소년 대상의 문학 공모를 대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4-6월 기간은 다양한 문학 공모가 활발하게 열리는 시기였기에 원하는 청소년 대상 문학상을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문학 공모에서 단편 소설의 분량 기준을 200자 원고지 80매 이내로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노을이 질 때]의 초판은 120매가 조금 넘는 분량이었고, 축약 과정을 거친 후로도 100매 아래로 겨우 들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단편 소설이라는 언급 외에는 아무런 분량에 대한 명시가 없는 정지용청소년문학상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결정한 이후로는 5월을 전후로 한 번 수정을 거쳐 다시 120매를 조금 넘는 분량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제출하게 되었다.

6월 24일 동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최근은 잘 모르겠으나 2022년까지는 고등부에서만 500명 언저리가 응모하는 공모라 만약 수상한다고 해도 장려상을 기대했었어서 놀랐다. 은상에는 예술고도 있는데 그 자리에 한국과학영재고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있는 광경이 생소하기도 하다.


 

 

*

 

그날 밤 내가 꾼 꿈에서 나는 한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많은 꿈이 그렇듯 나는 내게 찾아온 여자가 언제부터 내 옆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 위에 누웠을 때 빠르게 찾아오는 잠처럼,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내 인식에 스며들었다. 형체랄 게 없는 바람이나 물줄기가 흐르듯이, 조금씩 흘러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여자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직전까지 나는 노을이 지는 해변 위, 널찍한 의자에 눕듯이 앉아 그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평선 위와 아래는 비슷한 듯 명확히 구분되는 주황색이 각자의 방식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씩 돌릴 때마다 방사형의 태양 광선이 쬐는 형태가 달라졌고, 바람이 세게 불어 멀리서부터 파도가 일 때면 아득한 윤슬이 서로 섞이고 뭉쳐졌다.

그리고 태양은 바다 바로 위 어느 한 점에 걸친 채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오후에 달궈졌던 모래들은 미지근한 온도를 계속해서 유지하며 차가워지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들어 그 발을 모래 위에 올려놓으면 그 온도를 느낄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태양이 지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은 하지도 못한 채, 그 태양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 기다림을 알기나 하는지, 태양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밝은 노을을 꾸준히 토해내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구름이 다가오거나 물러가고, 바다에서 파도와 물결의 흐름이 달라질 때도, 태양은 위치를 옮기지 않았다. 그 태양을 바라보는 나도 눈이 부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저것도 언젠간 저버릴 평범한 노을이다, 하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노을이 예쁘네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제가 언제부터 노을이 예쁘다고 생각을 했었죠? 태양 그 자체보단 특별한 빛을 머금은 구름이나 하늘을 더 좋아했었는데. 오늘은 특이하게도 저 태양에 시선이 가네요.”

그녀는 내 바로 옆, 내 것과 똑같이 생긴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처럼 몸을 길게 뻗어 누운 채로 있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해 왼편으로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의 발바닥은 모래사장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가벼운 천 조각 같이 보였다. 그녀는 양어깨에 큰 흰색 수건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은 기억이 나지만, 그것이 직모인지 곱슬인지, 단발인지 장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예쁜 광경을 누군가와 함께 보면 좋겠다, 하고 생각할 때쯤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존재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빠르게 만들어낸 형체이니 빠르게 잊은 것이다.

“그러네요. 저도 이렇게, 뭐랄까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노을을 본 기억이 없어요.” 나는 말했다.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녀가 말했다. “진짜로요, 저기서 뻗어나가는 광선이 이 해변에 다다라서는 갑자기 휘어져 우리를 안아줄 거 같지 않아요? 그럼 정말로 특별하고 따뜻한 포옹이 될 텐데.”

우리는 앉아 있는 채로 조용히 광선에 안겼다. 나는 원래의 자세 그대로 누워있었고, 여자는 고개를 돌려 태양을 바라보았다. 해변 뒤쪽에서 무언가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을 타고 가만히 놓여있던 미지근한 모래알이 아주 조금 흩날렸다.

 

“저는 말이에요, 이렇게 예쁜 걸 보면 항상 ‘가족들이랑 같이 보고 싶다’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이 노을을 보면서는 ‘혼자여도 괜찮겠다.’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진짜로 이렇게 예쁜 거라면 혼자라도...’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당신과 나란히 앉아 보니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느껴져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나는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냥 노을이라는 걸 좋아하는 걸 수도 있어요. 저 자신도 모르게.” 하고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노을은 언제 시작되는지, 언제 끝나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오후가 끝나갈 때쯤 서서히 나타난 노을은 밤이 시작되면서도 서서히 물러가죠. 그런데 또 그 시작과 끝이라는 건 분명하게 존재할 거예요. 노을은 노을이 아닌 두 순간 사이에만 존재하잖아요. 그 시작하는 순간과 끝나는 순간을 통해 노을은 오후와 밤을 이어줘요. 길었던 하루가 뉘엿뉘엿 져가는 오후와 그다음 하루를 기대하면서 보내는 밤이 노을로 연결된다는 게, 뭔가 좋지 않아요?

그리고 아주 예쁘기도 해요. 노을을 위해 오후를 버티고 노을의 여운으로 밤을 버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 아름다운 노을은 져버려도 돼요. 어쩌면 지지 않는 것보다 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정말로 노을이 지게 되면 말씀대로 어두컴컴한 밤이 찾아오게 될 거예요. 지금 당신 발 바로 아래에 있는 모래가 식어버리듯이 어둠은 빠르게 주변을 잠식해요. 저 멀리서 이는 너울은 달빛을 반사해 내겠지만 지금처럼 찬란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보다도 먼저 너무 추워져서 이렇게 해변에 여유롭게 앉아 있기도 힘들 거고요. 저희가 그렇게 차갑고 어두운 밤을 노을과의 포옹 없이 보낼 수 있을까요?”

“그런 건 괜찮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양다리를 들어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여전히 나처럼 다리를 쭉 뻗어 눕지는 않고 두 다리를 양팔로 끌어모으고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그렇게 한 채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나를 여러 각도에서 보았다. “같이 껴안을 수만 있다면 그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정말로 그 상태로 잠들 수만 있다면, 다음 날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하고, 포옹할 수 있는 존재가 노을뿐인 건 아니에요. 가족뿐인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옅은 바람 소리를 배경으로 긴 침묵을 지켰다. 이따금 비릿한 향기를 품은 채로 불어오는 센 바람이 단발로 잘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어 댔다.

그녀는 묘하게 떨리는 날숨을 내쉬면서 다시 양다리를 모래 위에 올려 두었다. 그녀가 그 순간 모래의 온도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양의 위치도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깨에 걸친 큰 수건을 들춰내고 양팔로 동그랗게 감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단발머리는 이제 수건이 아닌 새하얀 살결이 드러난 어깨 위를 미끄러졌다. 그녀는 돌돌 말린 수건을 의자 위에 올려 두고는 일어서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가락이 모래 사장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는데도, 사박사박하는 그 소리는 꽤 길게 이어졌다. 그녀는 내 의자 바로 앞에 오도카니 서서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저를 안아줘요. 저도 당신을 안아줄게요. 우리도 서로를 안아줄 수 있어요. 노을이나 가족뿐만인 건 아니에요.”

 

어느 순간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도 내몸을 양팔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를 푹 밀어 넣은 내 가슴에서 그녀의 규칙적인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말을 시작할 것처럼 열려 있는 입에서 나오는 습한 공기였다. 나는 왼팔로 그 여자의 허리를 감고 등판의 자연스러운 굴곡과 널찍하고 매끈한 피부 특유의 부드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론 곱슬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남편분은요.” 하고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건 괜찮아요.” 그녀는 속으로 반복했다.

“제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을까요? 무슨 행동을 하든지 항상 가족 생각을 해요. 그럼, 저 자신에 대한 생각은 언제 할 수 있는 걸까요? 제 가족들도 언제나 같이 저에 대한 생각을 해줄까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제가 하는 생각과는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안 그래요?” 하고 그녀는 작게 뭉친 솜털 같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건, 지지 않는 노을과도 같아요. 지면 안 되는 노을이요. 수평선 밑으로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계속해서 그들을 안아줘야 해요. 그럼 밤은 언제 오고, 내일은 언제 오나요? 제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내일은 언제 오나요? 지구 반대편 사람들은 영원한 밤을 견뎌내야 하는 걸까요?”

 

그 순간 나는 지금까지 태양이 움직이지 않았고 노을이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태양은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내려와 수평선에 닿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황색 광구를 바닷속에 숨겼다. 완전히 사라져 눈이 부시지 않게 될 때까지, 천천히.

 

 

*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아주 생생한 꿈이 주는 특유의 찝찝함을 느꼈다. 내 무의식이 구축해 낸 하나의 정교하고 소중한 세계가 한순간에 소멸해 버린 기분이었다. 양쪽 귀에서는 그 해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여운처럼 남아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무의식적으로 내 가슴을 손바닥으로 훑어봤지만, 그 여자의 숨결이 남긴 희미한 따뜻함과 촉촉함은 느낄 수 없었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라, 그렇게 생생한 꿈을 꾸면서도 특이한 비유를 떠올렸네,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아침마다 눈을 뜨는 이곳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게다가 오늘 같은 일요일은 일요일만이 주는 특유의 가라앉은 공기 때문인지, 나를 내가 있는 이 공간과 더욱 확실하게 나눠 놓는다. 일주일마다 한 번씩,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데,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이상하게 창백한 햇빛과 희미하게 남아서 묘한 방식으로 심화된 토요일 밤 특유의 고요가 나를 그렇게 만든다. 그것들은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일요일의 아침잠을 깨울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도, 이유도 없는 이 고유의 느낌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이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진리나 원리 중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비밀 같은 것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도 일요일인가’하고 바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 너머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일요일 아침, 6차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는 몇 대뿐이었고, 그와 비슷한 수의 차량이 불법 주차되어 있었다. 도로 건너편엔 넓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상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상가 건물엔 걸린 낡은 간판들은 어떤 음식점과 꽃집, 당구장 같은 글씨를 달고 빼곡하게 늘어섰다. 한 여자가 애인이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계단을 나란히 걸어 올라가, 꽃집에 들어섰다. 몇 분 후에 커다란 부케 하나 혹은 둘을 든 남자와 함께 꽃집 바로 앞에 주차된 차를 타고 자리를 뜰 것으로 보였다. 그로서 불법 주차된 차량의 수가 하나 줄어드는 것이다.

구름이 움직이고 상가 사이사이 좁은 골목에 주차된 차들 위로 더 밝은 태양 빛이 쏟아졌다. 동시에 6차선 도로를 끼고 펼쳐진 그 거리에도 한 층 더 생기가 감돌았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창문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자 나는 관찰을 멈추고 침실을 나섰다. 불법 주차는 지금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어젯밤까지 읽던 작은 소설책을 들어 만지작거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소설 속의 이야기가 조금씩 떠올랐다. 늦은 시간까지 꽤 오래 읽어 자려던 참에 마침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게 흘러갔다. 여자 주인공이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하게 만들면서도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 마음이 타들어 갔을까, 자기 자신이 불쌍해졌을까, 하고 고민하면서 잠에 들었다.

 

아침을 대충 차려 먹고 식탁을 휴지로 닦은 다음 설거지를 시작할 때쯤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전 여덟 시 삼십 분 조금 전이니, 그곳에선 저녁밥을 다 먹었을 시간이었다.

“어 여보, 일주일 동안은 뭐 별일 없었어? 아들은 잘 있고?”

“어 뭐 여긴 특별할 거 없지. 아 그런데 제성이가 무릎 한 번 다쳤어. 까졌더라고, 무릎 아래쪽이.”

“진짜로? 언제? 어쩌다가?”

“몰라 그냥 학교 계단 내려가다가 발을 잘못 디뎠다는데...”

“정말? 그럼 크게 다친 거 아니야?”

“아이 아니야, 그냥 살짝 까진 거야. 걱정할 거 없어. 삼 일 전에 다쳤는데, 약 바르고 하니까는 어제 보니까 다 나았던데.”

“그래도 아팠겠는데 이틀 동안. 그리고 또 무릎에 뭐 달고 걸어 다니는 거 불편하잖아.”

“뭐, 이제 그런 거 잘 견뎌. 많이 컸어. 그리고 처음에 다쳤을 때 봤을 때도 그렇게까지 막 큰 상처는 아니었어서,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리고 계단에서 삐끗했는데 이 정도로 끝난 건 아주 다행인 거지.”

“그건 그렇네. 별로 안 다쳐서 다행이다. 내려가다 넘어진 거면 더 위험할 뻔했지.”

“그러니까, 하마터면 깁스할 뻔했어. 더 불편하고, 병원비도 많이 나오고... 아무튼 자기도 그런 식으로 얼마 안 다쳤다고 좋아하던데. 순간적으로 몸이 이렇게 옆으로 돌아서, 팔은 안 다쳤다고. 팔 다치는 게 더 불편하대.”

“하여간 참 많이 다쳐봐서 알아.”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아내도 따라 웃었다. “그러니까, 그게 더 걱정이야. 이렇게 잔부상 치르다가 언젠가 한 번 심하게 다칠지.”

“아이 뭐 그런 걱정을 해. 건강하고 행복하게만 자라달라고 기도해도 모자랄 판에. 학교생활도 잘하는 거 같던데, 요즘. 이번 화요일에 새로운 친구 생겼다고 한 이후로 학교 갔다 와서 얘기 많이 해. 같은 반 애인데 미술 수업 때 한 조로 활동하면서 처음 봤다더니 그림을 엄청 잘 그린대. 사진 찍어 온 거 실제로 봤더니 진짜로 그 나이에 맞지 않는, 뭔지 알지, 그런 게 있더라고, 자세히 보니까. 어쨌든 그래서, 걔도 한국계래. 그런데 한국어는 딱히 익숙하진 않고. 그래서 막 알려주기도 한다는데, 옆에서.”

“좋네. 아주 순탄한데, 이대로면. 벌써 그렇게 서로 지식을 나누면서 훌륭한 학자로 성장해 가는 건가?”

“벌써 그 정도까지야?” 아내는 웃으면서 말했다. “재능 발현이 빠르네. 아들의 아버지 유전 특징인가?”

“그런 건 몰라도, 뭐 대부분의 장점이 다 나한테서 오긴 했지.”

“진짜.”하고 아내는 나와 함께 실실 웃었다. “지금 본인 일이나 잘하셔. 거기는, 뭐 재미있는 일 없었어?”

“여기가 뭐, 거기보다 더 재미있기가 힘들지. 세미나 준비했다가 학회 갔다가 사람들 만났다가... 그래도 이번 주가 저번보단 확실히 더 여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다행이네.”

“응, 직전까지 바빴던 것도 있겠지만 확실히 할 게 적었어.” 나는 말하고 숨을 한번 돌렸다. “아 맞다 내가 수요일 저녁에 그, 저번에 말했던 세미나 연 미분방정식 하는 교수님 있잖아. 그 찰랑 머리.”

“어 맞아, 진짜 웃겼는데.” 하고 그녀는 회상하는 말투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진짜로 그 사람 머리 한 번 보고 싶다. 실제로 어떨지 궁금해.”

“진짜로 그 특유의 빛깔이 있어. 아주 오묘해. 완전한 흑발인데 말이야, 순간적으로 밝아진다니까.”

“아, 더 궁금해졌어, 그렇게 말하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 뭐 했는데?”

“내가 그래서 수요일에 그분이랑 같이 밥을 먹었거든, 둘이서. 나도 뭐 꽤 친한 편이니까 그냥 편하게 같이 먹었지. 그런데 갑자기 밥 조금 먹다가 아내 욕을 시작하는 거야.”

“어? 진짜? 뭔데? 무슨 얘기 했는데?”

“요 몇 달 동안 자기한테 갑자기 차가워졌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뭔가 이상하게 군다, 이러는 거야.”

“뭐야? 갱년기 아니야?” 아내는 웃으면서 말했다.

“모르겠어, 뭐 갱년기가 좀 심해졌나 보지. 아무튼 교수님이 말하는 게, 그 두 분이 원래 같이 영화를 자주 보러 갔었나 봐, 이전부터. 그래서 얼마 전에도 좋은 영화 개봉한 거 같아서 말했더니 갑자기 까칠하게 군다는 거야. 그런데 뭐 그럴 수 있잖아, 그날 기분이 좀 그러면 그러는 게 뭐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했더니 ‘한두 번이 아니야.’ 하고 시무룩하게 말하는 거야.”

“아 진짜로? 귀여우신데.”

“그렇지.” 하고 나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내가 아들 욕을 그렇게 한다는 거야.”

“그래? 왜 그런데?”

“그게 이번에 자기 자식이 대학교를 갔다고 했거든. 그런데 거기에서 아내가 그렇게까지 만족하는 거 같지가 않데. 자기가 ‘이 정도면 운이 좋은 거다, 예상보다 아주 성공한 거다.’ 이렇게 말해도 안 듣는대. 그러니까 별로 생각이 안 바뀌는 거 같대.”

“오 진짜? 그건 좀 웃기네.”

“아이러니한 게,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가 하는 건 아내 욕이잖아. 어쨌든 그런데 진짜로 웃긴 건 이렇게 막 흥분해서 말할 때마다 머리가 막 내려와서 눈을 가려가지고, 손으로 이렇게 찰랑, 하고. 또 고개를 까딱하면서 하는 그거 있잖아. 찰랑찰랑 이렇게. 그런데 그게 섬세하게 조절이 안 되니까 눈 찔려서 ‘아야’ 이래가지고.”

“뭐야 그게.” 라 하면서 아내는 웃었다. “‘아야?’”

“그리고 머리카락이 갑자기 내려와서, 숨 들이쉬는 거랑 타이밍이 겹쳤나 봐. 그래서 갑자기 머리카락을 입안으로 흡입하는 거야. ‘커흙’ 이러면서 기침하고. 근데 그러고는 또 찰랑, 하고선 또 하던 말을 계속해.”

“진짜 웃기네.” 아내는 킥킥거리다가 웃음을 조금 진정시키고 말했다.

“나 진짜 그때, 음식을 입에 막 집어넣어서 웃음을 막아냈지.”

“그러니까, 힘들었겠다. 버텨내서 다행이네.” 아내는 웃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키득거리며 말했다.

“정말로 다들 특이하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제성이랑은 저녁 먹었어?”

“어, 다 먹고 정리하고 전화한 거지. 오늘 점심에 로스트 치킨 그거 있잖아, 그거 사 와서 먹었거든. 그리고 먹고 남은 거에서 닭가슴살 부분 찢어서 드레싱 만들어서 샐러드 줬지. 빵이랑 해서.”

“좋았겠네. 나는 자기가 만든 드레싱 그게 맛있더라.”

“어, 좋아하던데. 치킨 데우는 거 보면서 ‘또 이거야?’ 하다가도, 그러다가도 또 잘 먹더라고. 드레싱을 좀 손을 봤거든. 발사믹을 좀 줄이고, 치킨이랑 같이 먹었을 때 새로운 맛이 나게 이렇게 해서.”

“아들은 좋겠어. 엄마가 이렇게 맞춤 요리사로, 잘 만들어주는데.”

“아이, 뭐 나도 계속 혼자 하다 보니까 익숙해진 거지. 그리고 또 우리 아들 만족시켜 주려면 이게, 정확해져야 한단 말이야. 뭐 평소랑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한 입 먹고도 바로 알아채.”

“그래도 뭐 대단한 거지. 난 요리가 제일 어렵더라. 이게 생각한 대로 실제로 만들어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뭘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아내는 옅게 웃었고, 나는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들 좀 바꿔줄 수 있어? 얘기해 봐야지, 오랜만에. 재미있는 일 많았던 거 같던데.”

“어, 어 그래”

수화기 너머로 “제성아, 아빠야, 아빠.”하고 아내가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제성에게 “아빠가 우리 제이슨 일주일 동안 엄청 재미있게 보냈던 거 같아서 얘기해 보고 싶대.”하고 말한 다음 수화기를 넘겨줬다.

“제성아, 우리 아들, 일주일 동안 잘 지냈어? 밥은 잘 먹었고?”

“응! 오늘 저녁에 먹은 거 엄청 맛있었어. 그게 소스가 다른데 닭고기랑 빵이랑 잘 어울려서. 그리고 빵도 맛있는 거였어.” 하고 그의 명량한 목소리가 한 번 처리된 기계음으로 들려왔다. 목소리만 듣고서도 그의 작은 얼굴과 부드러운 피붓결이 바로 앞에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은 마치 온 세상의 모든 그림자를 한순간에 밝힐 수 있는 빛처럼 찬란하고 따뜻하다.

“그러니까, 제이슨 엄마 요리 엄청 잘하지. 우리 아들이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니까 엄마도 열심히 요리할 힘이 나겠어.”하고 나는 ‘열심히’에 강세를 넣어 말했다.

“응, 응. 그리고 오늘 점심에도 그 치킨 먹었는데, 그것도 맛있었어. 이번에 먹은 거가 껍질 부분이 특히 맛있었어.”

“우리 제성이 대단한데, 벌써 뭐가 진짜 맛있는 건지도 잘 알고. 같은 걸 먹어도 아빠보다 더 맛있게 먹을 거 같아.”하고 말했다. “학교도 재미있게 다니고 있지? 엄마한테 들었는데, 우리 제이슨 진짜로 멋진 친구도 만났다던데.”

“어, 데니라는 친군데, 데니는 그림 엄청 잘 그려. 미술 시간에 같이 그림 그렸는데 데니가 잘 그려서 나도 칭찬받았어. 선생님이 ‘Wow! Its so realistic. Its wonderful!’ 했어. 우리 그림 보면서 제일 칭찬 많이 해줬어.”

“오, 대단한데. 제이슨이랑 같이 그려가지고 원래도 잘 그리는데 더 잘 그렸나 보네.”

“어 그래서 내가 ‘I think you are really good at drawing!’이라고 말하니까 데니가 ‘Really? Thank you!’ 하면서 좋아해 줬어.”

“우리 제이슨 진짜 대단하네. 그렇게 우리 제이슨을 도와준 친구들한테 고맙다고 하는 거, 제이슨이 스스로 잘하는 거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야. 우리 제성이, 학교생활 엄청 훌륭하게 하는 거 같은데? 들어보니까.”

“진짜로?”

“그럼, 당연하지. 아빠는 다 알 수 있어요. 제이슨이 얼마나 훌륭하게 크고 있는지.”

“진짜로? 아빠 고마워.”하고 제성이가 기쁘게 웃었다. 그 순간 미국 어딘가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밑의 그림자가 한순간에 밝아졌다.

“그래서, 그런데 데니도 엄마 아빠가 한국인이래. 그래서 나도 데니랑 한국어로 말할 수 있어. 그런데 아직은 잘하는 건 아니야. 그래서 나는 데니한테 한국어를 알려주고, 그리고 데니는 나한테 그림 그리는 걸 보여줘. 엄청 잘 그려서 신기해.”

“아마 데니도 제이슨이 한국어 엄청 잘해서 신기해할걸?”하고 나는 허리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부럽다, 아빠는. 우리 아들 그렇게 좋은 친구도 있고.”

“제이슨, You have to be proud of yourself. You know? 언제나. 알지? 약속할 수 있지?”

“Yes, I will. I promise, for sure, daddy.”하고 그는 웃었다.

“Thank you.”하고 나도 웃었다.

“제성아, 엄마 좀 바꿔줄레?”라 말하자 제이슨이 대답하고 수화기를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아내의 “아빠랑 통화 잘했어? 재미있었겠네.” 하는 말이 작게 들려왔다.

“어, 여보, 잘 통화했어? 근데 마지막엔 무슨 말 한 거야?”

“그냥 ‘You have to be proud of yourself.’ 맨날 하는 거 있잖아. 근데 우리 아들 학교도 엄청 잘 다니는 거 같아, 진짜로.” 나는 말했다. “아, 미국 가서 한 번 봐야 하는데.”

“일하는 거 좀 안정되면 와. 너무 조급해하진 말고. 그렇다고 또 무리하면 안 된다. 나나 여보나 제성이한테나 건강한 게 제일 중요해.”

“알지, 알아. 그냥 한번 안아주고 싶다는 거지.”

잠시 수화기 너머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제이슨이 어딘가로 걸어가는 소리만이 몇 초 동안 들렸다.

“그래도 아빠랑 떨어져 있는데도, 씩씩하게 잘 커서 다행이다. 계속 걱정했는데.”

“응 뭐, 제성이는 잘 지내지. 2학년 올라가면서 더 잘 지내는 거 같아. 다행이지. 정말로 감사하고.”

“아 맞다. 나 오늘 아침에 꿈을 꿨거든, 꽤 특이한 거.”

“그래? 오랜만인 거 같네.”

“응 그러니까. 그게 무슨 내용이었냐면, 내가 꿈속에서 어느 해변에 누워있었거든. 노을을 보면서. 여보 노을 좋아하잖아.”

“그치, 그 뭔가 저녁이라는 시간이 그렇지. 그래서 뭐 어떻게 됐어?”

“그런데 그 노을이 지지 않는 노을인 거야. 태양이 움직이지를 않고 그냥 같은 자리에 가만히 떠 있어. 물론 꿈이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 하지. 그래서 뭐 딱히 재미있는 일은 없었고, 어떤 사람이랑 얘기했어. 나란히 앉아서. 대화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난다. 근데 좀 어려운 내용인 거 같아, 느낌이.”

“그 사람은 뭐 특징 같은 거 기억 나는 거 있어?”

“그게, 아마 단발머리였는데. 여잔지 남잔지는 모르겠어.”

“단발머리인데 남자라면, 그 찰랑 머리 교수님처럼?”

“그렇네.”하고 나는 말하고 조금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영향이 아예 없던 건 아닌가.”

“대화 내용은 한번 생각해 봐. 꽤 재미있는 꿈인 거 같은데. 뭔가 그런 특이한 분위기의 꿈이면 또 특이한 의미를 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한가할 때 고민해 봐야지. 일주일 동안 수고했어, 여보.”

“응, 여보도. 일요일 잘 보내고. 여보 사랑해.”

“나도 사랑해. 잘 가. 안녕.”

 

통화를 끝내고 한숨을 내쉬자 깊은 날숨의 소리가 주방을 공허하게 메웠다. 내가 그 공허의 잔잔한 수면 위로 풍덩, 하는 소리를 내면서 빠져든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때 꿈의 내용이 기억났다. 색감이며 소리며 그 여자의 말 한마디까지, 꺼져있던 전등의 스위치를 의도치 않게 켜버린 것처럼, 한 번에 모든 게 떠올랐다. 내 가슴을 무의식적으로 쓸어내리게 만들었던 그녀의 뜨겁고 묵직한 숨결까지도.

그 포옹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고민해 보았지만, 그 답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꿈속에서 내가 쓰다듬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내 아내의 것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나는 내 아내가 자신의 긴 갈색 생머리를 빗질해 넘기는 뒷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내게 안긴 여인의 검은 머리칼 사이를 몇 번이고 쓸고 지나갔던 내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손가락과 손바닥 위에선 뭔가 간지러운 감촉 같은 것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엄지와 검지를 천천히 비비면서 그 부드러움을 상기해 보았다. 그리고 꿈속에만 남겨진 그 여인과 그녀와의 포옹을 어렵사리 기억해 냈다. 그 형상과 촉감과 온기는 알아볼 수 없게 한데 뭉친 채로, 저 먼 곳에서 조금씩 흔들거리는 아지랑이처럼, 나의 눈앞과 손끝에서 아른거리기만 했다. 그것들은 나의 오른손에 기묘한 여운만을 남겨둔 채로 내 의식 어딘가, 깊고 어두운 우물 같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러고선 다른 기억들과 함께 찬찬히 잊히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은 영원한 밤을 견뎌내야 하는 걸까요?”하고 꿈속의 여인이 말했다.

사실은 노을이 지는 곳 반대편엔, 일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쩐지 영원한 일출이 영원한 밤보다도 더 슬프게 느껴졌다. 영원한 일출이 있는 곳에선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희망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다음엔 해가 올라와 이 땅을 온정으로 감싸안아 줄 거야, 라고 소망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과 삶을 포기하게 하는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저 먼 곳에선 뻗어나가는 노을의 강렬한 주황빛의 광선이 내 가족들을 한 품에 안아준다. 나도 지평선 바로 위, 비슷한 각도로 낮게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떠라.’하고 간절히 빌면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딱 한 번 꾸었던 노을이 지는 꿈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나는 지구 반대편 사람인 것이다.

 

 

*

 

내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 외국행을 마음속으로 결심했을 때, 나는 여자 친구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자고 부탁했다. 대학교 3학년이 끝나가는 한겨울에 우연히 만난 여자로, 대화로까지 발전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서로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관계였다. 서른 살이 코 앞까지 다가온 나이에, 서로의 성격과 조건, 만나온 세월을 고려하면 충분히 좋은 결혼 상대였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오직 사랑만을 쫓아 그녀를 만나온 나에겐 아주 큰 행운으로 느껴졌다. 나는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곤란해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이 나 자신의 노력이 아닐 때, 감사할 줄 알았다. 그 관계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그녀로부터 자연스레 찾아온 행운이었던 것이다.

 

서로를 처음 만난 날, 우리는 12월의 쏟아지는 폭설 아래에 있었다. 돈벌이로 삼던 한 여고생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과외를 마친 뒤,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택가를 벗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눈이 쏟아져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집을 나설 때 그 학생의 어머니가 눈이 조금 내리니 우산이라도 챙겨가라고 말했지만, 나는 부담스러워서 대충 둘러대며 거절했다. 그리고 길모퉁이에 놓인 작은 편의점의 차양 밑에서, 눈이 내릴 땐 이상하게 더 창백해지는 그 조명을 등지고, 그때 그 우산을 받을걸, 하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 폭설은 평소 비가 아닌 눈은 그저 무시하고 갈 길을 가는 나에게도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눈송이가 바람을 타고 빠르게 휘몰아치며 눈앞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광경은, 언제나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차양 밖의 물체들이 마치 거칠고 희뿌연 기름종이로 구분된 공간에 놓인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고, 주변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털 귀마개를 쓴 것처럼 조용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동떨어져 가는 듯한 그 묘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서 있었다. 거센 눈보라와 조금의 간격만을 두고 서 있는 나의 몸과 그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나의 정신이 어째선지 분리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둘 중 하나는 현실 세계에 남고, 나머지 하나는 그와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는 어떤 미지의 세계로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본래 나를 구성하던 내 일부가 예기치 못한 위화감과 당혹감을 느끼며 그 미지의 세계 속을 혼란스럽게 떠돌게 될 것이다. 내겐 그 사실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정신없이 달리던 여자가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나와 부딪혔다. 그녀는 검은 패딩 모자를 꾹 눌러쓴 채로 달리다가 부딪히면서 그 두 손을 떼버렸다.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지르면서 휘청거렸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에게 연신 사과했다. 과외 자료와 문제집이 들어있는 검은색 에코백은 바닥에 떨어진 채로, 차양이 보호하는 구간의 경계에 걸쳐있었다. 다음 과외에 쓸 종이 몇 장이 도로를 향해 저 멀리 빠져나가 순식간에 눈송이로 소복이 덮여서 애처롭게 젖어갔다. 여자는 이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는 사과하면서 종이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그것들을 가방에 담아 내게 건냈다.

“죄송해요. 다친 데는 없으세요? 이거 종이인데 괜찮은 건가요?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민망한 듯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로 숨을 골랐다. 나는 내 가방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면서 나는 문제없고, 오히려 그쪽이 더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정말요? 다행이다. 저도 괜찮아요.”하고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는 모자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가느다랗고 선명한 눈 조금 위에는 옅고 부드러운 눈썹이 나 있었고, 푹신한 살로 덮여서 돌출된 광대와 솜털이 빼곡하게 나 있는 매끈한 볼에는 옅은 홍조가 띠었다. 길고 매끈한 그녀의 검은색 머리카락은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귓바퀴를 한 번 감싼 뒤에 가슴까지 내려왔다. 희미한 분홍색을 띤 한 쌍의 입술이 미소와 함께 조금 벌어지면서, 그 사이로 앞니의 반듯한 절반이 보였고, 뿌옇고 따뜻한 입김이 그녀의 날숨에 맞춰 새어 나왔다.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하나둘 앞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죄송해요, 놀라셨죠. 저도 눈을 피하고 우산을 살 곳을 급하게 찾다가, 모퉁이 너머를 못 봤네요.” 그녀는 말하면서 몸을 돌려 나와 같은 쪽인 차양 바깥의 도로를 바라보았다. “아, 엄청나게 춥네요. 눈도 많이 내리고요.” 그녀는 두 손의 손가락을 모두 모아 입김을 호호 불고는, 그 손으로 양쪽 귓바퀴를 감싸 쥐었다. 나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건 사랑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낭만적인 첫 만남이 아닌가, 하고 조용히 생각했다.

“편의점, 들어가시나요?”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2초 만에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편의점에 들어서 각자의 우산을 하나씩 사고, 연락처를 교환한 다음,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해치며 각자의 길을 나섰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우산 위로 눈송이가 부딪히는 틱틱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얼굴을 생각했다. 우산 위에 눈이 어느 정도 쌓이자, 그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녹은 눈으로 젖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신발 밑창이 마찰하는 소리와 나에게 미소 지으며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그것은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귀에서 뇌로 전달되는 청각의 형식이 아닌,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 반복되는 울림의 형식을 취했다. 그녀는 악보에서 지독한 도돌이표를 만난 악기 연주자처럼 나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고, 나는 그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그때 나와 같이 대학교 3학년을 마쳤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한 해 빠르게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녀보다 한 살 더 어렸다. 그녀의 이름은 이지슬이었고, 첫인상과는 다르게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했으며, 대학을 졸업 직후에 취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집안은 가난하거나 부유하지 않은, 말하자면 평범한 편이었으나, 그저 빠르게 경제적인 자유를 얻고 싶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자립심이 강하고 이래저래 다양한 일에 참여하면서 적응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때문에 나는 그녀가 원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순수 수학을, 그것도 1년 빠르게 전공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면은, 수학과 애들이 하는걸, 너는 19살 때 했다는 얘기야?”

“네, 그렇죠. 그런데 사실은 대학교 1학년 내용은 제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도 거의 다 포함이 되어있어서요, 2학년 때부턴. 말하자면 17살에 한 거죠.”

“진짜 신기하네. 나는 전공과목 들으면서 수학이 제일 어렵던데.”하고 말하면서 지슬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추위가 물러가기 시작하는 2월 초중순, 그녀에게 사귀자고 말했다. 나는 원래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면서 편한 존댓말을 사용했지만, 그녀가 “사귀는 사이에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무슨 존댓말이야. 어차피 대학도 같이 졸업할 거 아니야?”라 말하면서 그만두었다.

우리 둘은 대학교 4학년 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탓에 졸업 이후 각자가 취업 준비와 대학원 관련 일로 바쁠 때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짧게 보내는 그 시간 동안 하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더 재미있고 풍부한 느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취업에 성공했고, 나는 대학원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4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갈 때쯤 나와 지슬은 멀지 않은 곳으로 2박 3일의 여행을 떠났다. 해안가에 접해 있는 크고 평화로운 마을 같은 곳이었는데, 여행지로 유명하지 않아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고,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었다. 지슬은 그곳의 해산물 요리들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식탁 위의 정해지지 않은 한 점을 가만히 바라보며, 턱을 천천히 움직여 음식을 조심스럽게 씹고 있었다. 조금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옅은 바다 비린내를 몰고 오는 소리가 났다. 지슬과 나뿐인 식당에는 오직 그 소리뿐이었다.

우리는 식당에서 나와 길을 걷다가, 바닷가와 접해 있는 돌담에서 적당히 무너져 내린 부분을 찾아내, 그곳에 나란히 앉았다. 그다지 폭이 크지 않고 부서지고 남은 모양새가 가운데로 기울어져 있어 자연스럽게 몸을 밀착하게 되었다. 우리는 부서진 돌담을 다시 메우는 벽돌 같은 존재가 되어 서로를 안았다.

우리가 떠나온 곳과 무너져 내린 돌담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는 상관없이, 그 둘은 아득할 정도로 서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다와 나, 돌담 사이 공간과 그녀가 한데 모여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구성해 낸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 나는 분명히 속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광대뼈를 덮은 살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쓰다듬거나 꼬집듯이 쥐는 것을 좋아했다. 그 부드럽고 풍만한 촉감과 조금 당겼을 때 피부가 끌려오면서 이목구비가 미세하게 늘어지는 모습이 귀여웠다. 평소보다 세게 꼬집었을 때 순간적으로 그 부분의 피부가 조금 빨갛게 물드는 모습은 첫 만남 때 본 그녀의 홍조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마다 지슬은 나와 눈을 맞췄다가, 팔을 타고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내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상태로 손가락과 손가락에 붙잡힌 자신의 피부를 몇 초간 내려다보고는, 다시 내 얼굴을 보았다. 가끔은 가느다란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그 안에 담긴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내게 가만히 보여주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막 만지는 장난이기에 보통 때라면 기분이 좋아질 만한 장난은 아니었다. 따라서 분위기가 적당하거나 물어봐서 허락받았을 때만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주물러 볼 수 있었다. 본인의 얼굴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는 나에게 겉으론 조금씩 짜증을 내면서도 언제나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내가 그녀의 광대를 마음껏 만질 때 끙끙대며 뭐라 하던 그 자연스러운 목소리도 좋았다.

그녀도 나처럼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러나 취향은 완전히 반대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접점이 없었다. 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주로 동양 작가와 몇몇 유럽 작가가 쓴 순수문학의 색채가 강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녀는 SF를 특별히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읽은 [노르웨이의 숲]이 가장 기억에 남고, 그때로 돌아가지 않는 한 그 감정을 느낄 순 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 아버지를 통해 필립 K. 딕을 처음 접하게 되었으며, 그의 소설이라면 무엇이든지 좋다고 신나게 말했다.

 

“이성현 군, 자네, 이후에도 연구를 계속해 나갈 건가?”하고 나의 박사과정 지도 교수는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 같은 세월의 흔적이 적었으나 이상하게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다. 그 때문에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나이를 알리기 위한 용도의, 분명히 그곳에 있지만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는 특별한 기운과도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교수의 은색 무테안경에 끼워진 두껍고 무거운 안경알은 왜인지 형광등 빛을 특히 더 잘 반사해 냈다.

교수는 미국의 수학 연구소에 나에게 적합한 자리가 나 그곳에서 연구하기를 제안했다. 내 재능과 열정을 신뢰하고, 상황이 잘 들어맞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라 말했다.

“내가 자네의 사생활이나 현재 사정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 좋은 자리가 생겼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한국을 뜰 수 있는 상황은 아니란 거쯤은 알고 있어. 그래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을 하게 되어 미안하다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뭐 어찌 할 바가 없었네. 그쪽도 상황이 꽤나 급한 모양이야. 그러면 미국 연구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시간문제겠지. 안타깝지만, 지금은 하나하나 정리하거나, 오랫동안 고민해 보거나,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 상황이야. 그런데도 내가 자네를 이렇게까지 추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거쯤은 알고 있겠지? 거기는 정말로 자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곳이야. 한 번 고민해 보게나. 말했지만, 오래는 못 기다려 줄 거 같아. 나는 자네를 믿고 있네.

마지막으로,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다만,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일들을 최대한 깔끔하게 포기하는 법도 살아가면서 배워야 하는 소양 중 하나라네. 이만.”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남아 있던 커피를 들이켰다. 걸어가면서 커피 자국이 남아 있는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휴게실 문을 열어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이 다시 완전히 닫힐 때까지 그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똑같이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왼손으로 구겼다. 벌어진 틈 사이로 커피가 한두 방울 새어 나오기 시작하자 나는 구긴 종이컵을 버리고 휴게실을 떠났다.

내가 지슬에게 교수가 한 말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잘된 일이라며, 좋겠다고 말했다.

“교수님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거든. 물론 굳이 교수님 때문은 아니더라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만큼 또 그 연구소가 좋은 곳이란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다들 가고 싶어 하고. 그런데 이게 원할 때마다 한국을 들르거나 할 수도 없고, 미국에서 연구하는 게 연장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무기한으로. 꼭 이 연구소가 아니더라도.” 나는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 가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간 거니까, 자기도 자기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고?”

“어,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나 때문에 더욱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힘든 일은 맞지만,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그녀 자신의 삶도 내 삶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내 부탁을 거절했다. 도저히 마음을 굽히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이 선택해야 할 때는 맞지만, 그것은 선택지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연락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만이 당장에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말했다. 그 정도로 중요하고 서로를 받아들여야 할 때에, 헤어진다는 건 지슬에겐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나 자기 얼굴 만져도 돼?”

“응.”

“고마워, 누나.”하고 나는 조금 있다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누나야. 갑자기.”

그녀의 광대와 피부는 평소보다 따뜻했다.

 

 

*

 

미국에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 몇 개의 모닝 루틴을 이행하고, 동료와 함께 밤까지 연구한 후에 집으로 돌아오거나, 쉬는 날엔 집 근처의 공원이나 여유 있는 식당 같은 곳에 들러 몸을 늘어트렸다. 나는 둥근 모양의 넓은 공터가 중앙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산책한 다음, 공터 옆 벤치에 앉았다. 공터를 크게 빙 두르는 벤치 사이사이마다 큰 활엽수가 풍성하게 자라 있었고, 그 나뭇잎은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바람과 함께 펄럭이며 역동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무가 더 크고 오래될수록, 나뭇잎들은 더 여러 층으로, 그리고 더 빼곡하게 햇빛을 가려, 그 사이로 비치는 광선의 움직임이 적었다. 따라서 큰 나무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때면, 조그마한 빛줄기가 반짝했다가, 밝은 연두색만 보이고, 또다시 반짝하는 과정을 느리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두 눈을 감으니, 내 눈꺼풀 피부 조직과 그 사이를 통하는 혈액이 시야를 붉은 배경으로 칠했다. 그 위에선 희미하고도 희미한, 나뭇잎의 연한 초록색이 풍성하게 아른거렸다. 바람과 저 위의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면 동시에 감은 눈에 보이는 옅은 초록빛이 변칙적으로 휘날렸다. 그 상태로 오래 늘어져 있다 보면, 저 멀리 어딘가로 아득해지면서 눈을 뜨기가 싫어졌다.

점심을 먹어야 할 때가 되면, 나는 토마토 소스가 시큼하지만 재료들이 비교적 좋은 파스타를 종이 상자에 담아 파는 공원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큼함을 감추기 위해 고기와 치즈 토핑을 하나씩 추가해 주문했다. 주문한 다음 매장 아무 데나 놓인 검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다 보면, 직원들은 내 점심을 빠르게 만들어 키 큰 사다리꼴 모양의 상자에 담았다. 또 다른 직원이 종이 상자를 카운터 근처의 매끈하고 평평한 금속판 위에 올려놓고, 검은 포크 하나를 꺼내 고무줄로 포크와 상자를 묶었다. 그 직원이 작은 수첩에 휘갈겨 쓴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면, 나는 점심을 챙겨 다시 공원으로 돌아간다. 나는 상자 윗면에 있는 종이로 만들어진 헐렁한 걸쇠 같은 것을 풀고 플라스틱 포크로 음식을 잘 섞으면서 언제나 똑같은 그 냄새를 맡는다. 맛은 그때그때 요리하는 직원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신기하게도 냄새는 언제나 변하지 않고 똑같았다. 세상 속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의 모임에서 이 파스타의 냄새가 한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사실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파스타를 들고 벤치에 앉았을 때 공터 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어린아이가 노란색 공으로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공이 하늘 높이 떠오르고 다시 떨어지는 과정을 그들은 일정한 주기로 반복했다. 그 두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는 듯 잔디밭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리고 공터를 빙 두른 인도를 따라 캡 모자와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쓴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상의 없이 자신의 붉게 달아오른 넓은 피부를 드러내며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었다. 그가 신고 있는 파란 운동화는 간결한 흰색 스트라이프가 나 있었으며 옅은 갈색의 주름진 밑창을 가지고 있었고, 입고 있는 반바지는 그저 조금 큰 치수의 트렁크 팬티처럼 보였다. 오른쪽 벤치에서 나란히 앉은 여자 세 명과 그중 한 여자의 무릎 위에 앉은 남자아이 하나, 그리고 그들 앞에 서 있는 남자 한 명이 함께 대화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서로서로 친한 부부들의 모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부 세 쌍이 모이는 곳에서 남자 둘이 참석하지 않았거나, 여자 셋의 모임에서 남편 하나가 더 온 것이다. 대화는 자신들의 부부 생활같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서 있는 남자가 던진 농담에 세 여자가 크게 깔깔대는 흐름이었다. 남자아이는 다리를 앞뒤로 흔들거리거나, 자신에게 무릎을 내어준 여자의 머리카락을 작은 손으로 만지작거리거나 했다. 그러다 지루해 못 참겠다는 듯 작게 하품하고서, 아이들이 캐치볼을 하고 있는 공터 중앙으로 달려갔다. 왼편에 앉은 남자 대학생 두 명은 대화 주제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빠르게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내가 들은 단편적인 정보들은 각각 전에 추천받아 본 영화, 소설을 읽고 쓴 글, 답을 찾기 어려웠던 수학 문제와 물리 문제,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 세계와 미국 정세의 흐름 등에 대한 것들이어서 도통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매주 찾아오는 거의 모든 휴일마다, 그런 묘하게 뒤틀려서 설명할 수 없이 달라져 버린 평범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들에 둘러싸인 채로, 나는 혼자였다.

나는 토요일 밤마다 지슬과 통화했다. 그녀로부터 오후 9시쯤에 전화가 걸려 왔으니, 그녀는 나에게 오전 11시쯤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점심을 먹기 전까지 이야기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직장에는 바쁜 일만큼이나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그녀는 둥근 안경을 쓰고 검은색 뽀글 머리를 가진 연구팀의 한 남자가 엄청 웃기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흉내 내는 그의 말투와 그녀가 묘사하는 그의 행동은 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면서 그녀와 함께 웃게 되었다. 그리고 지슬은 두 살이 많은 자신의 친오빠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소설 취향을 가진 마른 편의 남자로, 5년 전부터 한 체육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빠로부터 전해 들은 체육관에 다니는 여자 이야기를 내게도 해주었다. 그녀가 지내는 대학 기숙사에선 밤마다 들려오는 떠드는 소리 때문에 자지도 공부하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체육관에 다니는 여자, 지슬의 오빠, 그녀를 건너 마침내 미국에 사는 나에게까지 닿은 그 이야기와, 지금의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매 순간 늘어나는 것 같기도,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한 그 거리감은 지슬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한 번에 흐트러져 버렸다. 그 목소리로 인해 그것은 순식간에 내 손끝 바로 조금 앞에도 있게 되었고, 잔상마저 남지 않는 먼 곳에도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원근감을 상실한 채로 그녀의 목소리만을 의지하고선,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 사이를 부유했다. 커다란 물고기의 방금 죽은 시체처럼, 천천히.

 

토요일 오후 세 시, 그녀로부터 지금 당장 통화가 가능하냐고 연락이 왔다. 나는 마침 공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어쩐지 양이 적은 파스타에 의아해하며, 냉장고 속에서 배를 채울 것을 찾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냉장고 문을 닫고 그녀에게 전화해 아직 잠에 들지 않은 것인지, 새벽에 깨어난 것인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급하게 물었다. 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오랫동안 울고 있었던 것처럼 흐느꼈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직장과 관련해 만난 한 남자를 좋아했다.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점검하고 부정해도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미안해하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대한 그로부터 멀어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순간적인 마음이 아니었나, 물리적 거리 때문에 그런 것이었나, 물었다. 꽤 오랜 시간 말하는 동안에도 이것들이 전부 쓸모없는 물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묻는 사람과 답하는 사람 모두에게 그 물음의 의미는 없었다. 단지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뿐이다.

“나한테, 나한테 중요한 건, 그렇게 해서 자기가 행복하고,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냐는 거야. 자기가 이렇게 헤어졌는데, 그럴 수 있겠어? 난 다른 일보다 그게 더 중요해.” 나는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하고 그녀는 조용히 울면서 말했다.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한두 번 생각해 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안녕, 잘 지내.”라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우리 둘 모두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해 더 이상 무어라 대화할 것이 없었다. 나는 휴대 전화를 아무렇게나 두고 좁은 식탁 의자 위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수백, 수천 번의 토요일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마음에 고민해 보았다.

 

그것이 내가 들은 지슬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지슬은 몇 년쯤 뒤에 그 남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 일 년 반쯤이 흘렀을 때, 집에서 자살했다. 연락처가 남아 있었는지도 몰랐던 그녀의 친오빠가 부고를 전했다. 그는 그때 몇 년 전의 결혼 소식도 함께 전했다. 그는 내가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토요일 이른 새벽에 자살했고, 나는 그 소식을 토요일 오후에 전해 들었다.

[노르웨이의 숲]의 하쓰미. 하고 나는 그때 속으로 말했다. 나가사와 선배.

 

나는 배를 채우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할 때쯤 공원 벤치로 나갔다. 그리고 그 벤치에 앉아서 조금 울다가 진정하다가를 반복했다. 저녁 산책을 하는 사람 몇몇이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진정으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는가, 생각했다.

조금 뒤 해는 노을로 바뀌었다. 세상이 온통 연하게 희석된 주황빛으로 가득 차고, 나무와 사람과 벤치와 잔디의 그림자는 한 방향으로 주욱 늘어졌다. 저 멀리 있는 세상 반대편으로 뻗어나가는 광선들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니, 새로 산 전구처럼 밝게 빛나는 주황색 태양이 보였다. 태양은 아주 천천히 하강하면서, 공간을 더욱 강렬한 붉은 빛으로 채우고, 그림자들을 더욱 길게 늘어트렸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일들을 최대한 깔끔하게 포기하는 법도 살아가면서 배워야 하는 소양 중 하나라네.”하고 교수가 말했다. 나는 미국에 와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일을 포기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고향과 가족을 잠시 포기하고 연구를 하러 와, 지슬을 영원히 포기했다.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포기하였는가. 그리고 그 결과 내 안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나는 져버리는 노을의 마지막 빛 한 줄기를 양팔로 꼬옥 끌어안고,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내 안을, 그 빛이 밝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노을이 지고 하늘엔 거무칙칙한 남색이 묵직하게 내려앉고, 그 아래엔 희미한 잿빛의 구름이 자신을 허공에 묻혀가며 천천히 미끄러졌다. 공기가 제법 쌀쌀해지자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빼곡히 뭉쳐있는 고층 빌딩들은 하나둘 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공기 중의 연기나 먼지에 산란하는 빛들로부터 희뿌연 노란색의 돔과 같은 형상이 그 주위에 만들어졌다. 그 혼란 속에서도 마침내 내게 도달한 조그마한 빛 한 줌은 불규칙한 비현실의 윤슬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빛의 다양한 변주가 지닌, 아득해질 정도의 애절함과 눈부신 찬란함이라는 양가성은, 미국이 싫어지게 만들었다.

내가 무엇을 잃고 어떻게 되는지는, 지금 보이는 저곳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어느 장소로 가든, 언젠가는 뼈아프게 알게 되는 진실이다. 그리고 저 빛에 둘러싸인 채로 건물을 가득 메운 사람들도 분명 무엇인가를 잃어가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지슬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 어둠 속으로 산란하는 빛줄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자신들의 변치 않는 찬란함과 굳건함을, 모두에게 뽐내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다.

 

 

 

 

 

 

The End

 


 

 

 

 

이번에도 짧은 작품 해설과 몇 가지 TMI 및 잡답을 풀어보려 한다.

[노을이 질 때]는 [우리들]과 비교해서 확실히 상식적이고 쉬운 소설이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수학 연구자라는 설정도 퇴사한 직원들과 그 지인들을 죽이며 계속해서 존속하는 농업 공동체보다는 일상적이다. 인물 및 세계관 운용을 비롯해 상징이나 은유 또한 [우리들]보다 검소하게 사용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독자들이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가장 해설이 필요한 부분은 아무래도 모호하게 쓰여진 첫 절의 꿈 묘사일 것이다. 후에 3장에서 이성현이라고 이름이 밝혀지는 '나'는 꿈 속 여인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다가 끝에 이르러선 곱슬거리는 단발머리라고 서술한다. '그날 밤 내가 꾼 꿈에서 나는 한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첫 절의 전반부, 꿈에서 한 발 물러난 상태로 서술하는 부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몇 개의 구절까지도 꿈 특유의 모호함이라는 의식 구조의 흐름 속에 포함시키고 싶었다. '그날 밤'으로 문장을 시작해 꿈과 시간적인 거리를 두어 깨어나고도 한참이 지난 뒤의 서술처럼 보이게 했지만, 사실은 꿈 속에서 하는 서술처럼 앞뒤가 맞지 않게 서술한 것이다. 이는 첫 절을 읽은 독자가 후에 작품 전체를 넓은 의미에선 하나의 꿈처럼 느끼게 만든다. 아내와 아들을 사랑하지만 여전히 지슬을 떠올리는 성현과 성현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직장 동료를 사랑한 지슬의 모습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실 나도 지슬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 어둠 속으로 산란하는 빛줄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며 성현과 지슬의 인생을 마치 꿈처럼 어딘가로 산란해 사라지는 존재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꿈 속의 여인을 마냥 꿈의 모호함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꿈 속 여인이 상징하는 대상은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독자는 꿈 속의 여인으로 1절에서는 '나'의 욕구의 특정되지 않은 대상, 2절 끝에서는 아내 혹은 아내와 떨어져 사는 외로움을 채워줄 누군가, 소설의 끝에선 지슬을 떠올린다. 아내는 갈색의 긴 생머리, 지슬은 검은색의 긴 직모를 가졌지만 그 여인만 단발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그녀의 정체가 어느 누군가로 고정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변화하도록 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소설을 전부 읽은 독자는 결국 그 여인은 지슬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성현이 미국에 대해 그리워하는 것은 여자로서의 아내라기보단 아들 제성, 혹은 안정되고 평범한 가정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도 첫 절을 쓸 때 지슬을 한 단계 추상화시켜 묘사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여인을 다루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나'가 꿈 속의 여인에 대해 그녀를 아름다운 것 혹은 작고 연약한 것으로 묘사하는 등 기본적으로 예찬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남편분은요.” 하고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건 괜찮아요.” 그녀는 속으로 반복했다.

'나'는 이전까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다 어느 순간 품에 안긴 여인에게 '이런 해동을 하면 남편과 문제가 생기지 않는가' 묻는다. 이는 지슬의 행복을 바라며 그녀와 이별한 성현이 여전히 그녀의 가족 관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건 괜찮아요'라는 여인의 대답은 그럼에도 자신을 더 사랑해주길 바라는 그의 무의식의 또 다른 한 편을 나타낸다. '나'의 꿈 속이니 그 꿈의 포함된 여인의 대답 또한 '나'의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의 대답에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는 '나'의 행동과 그 품 속에서 따뜻한 숨을 내뱉는 여인을 상상하는 그의 무의식의 모습은 지슬에 대한 성현의 마음 중 후자의 비중이 더욱 크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해당 문답이 속으로 오간다는 점도 중요하다. 우선 이는 표면적으로 장면 자체의 비논리성을 통해 꿈의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극에 달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그녀가 속으로 반복한 내용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서술자가 설명해주는 것이 이상하다. 자신이 속으로 생각한 질문을 서술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여인의 속을 알지 못하던 서술자가 그녀의 생각을 꺼내놓는 것이 갑작스럽다는 것이다. 이는 여인, 즉 지슬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녀가 남편보다 자신을 선택하는 상황을 상상하고, 어느 정도 그 상황을 바라는 그의 무의식적인 욕구가 반영된 서술이다. 그러나 이때 실제로 여인은 그의 품에 계속해서 안겨있다.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여인을 '나'의 무의식은 계속해서 상상한다.

마지막으로 지는 노을과 지지 않는 노을 사이의 상징 변환이 첫 절에서 여러 번 일어난다. 우선 노을의 상태인 지는 것과 지지 않는 것 이전에 노을은 첫 절에서 크게 두 가지를 상징한다. 포옹으로 대표되는 '안정' 및 '평온',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보고 싶다는 여인의 말로 부여되는 '가족'이 그것이다. 노을은 지는 게 낫다는 여인의 말에서 '나'가 '지는 노을'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안정과 평온이 사라지는 '변화'의 상황이다. 이때 변화는 '나'가 걱정하는 부정적인 의미도, '내일로 나아간다'는 여인의 말처럼 긍정적인 의미도 모두 가지고 있다. 반면 지지 않는 노을은 꿈 속 세계에만 존재한다는 점으로부터 어떤 환상의 존재처럼 다루어지며, 노을 자체가 기존에 가지던 안정의 상징을 포함해, 여인의 말에서 '가족과 함께할 의무'의 의미를 추가로 부여 받는다.

여인, 즉 성현의 무의식 속에서의 지슬은 처음엔 지지 않는 노을에 긍정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점점 그로부터 회피하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이는 안정된 관계인 성현을 포기하고 변화한 마음을 따라가기를 선택한, 그렇게 이뤄낸 가정 속에서도 자살한 지슬에 대한 기억이 반영된 결과이다. 가족과 지내며 힘들었을 지슬을 상상하며 걱정하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안기길 바라는 성현의 무의식적인 욕구가 드러났다고도 말할 수 있다.

노을이 가진 안정과 평온이라는 상징에만 집중해보자.

그런데 또 그 시작과 끝이라는 건 분명하게 존재할 거예요. 노을은 노을이 아닌 두 순간 사이에만 존재하잖아요.

하고 여인은 말한다. 안정과 평온에는, 그리고 사랑에는 분명한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 그것이 어떻게든 시작된 이상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다. 영원한 줄 알았던 꿈 속의 노을이 결국은 지 듯이, 언젠가는 저물어야 한다.

여기까지 후반부를 이용해 첫 번째 절의 의미와 상징들을 독해하는 방법을 살펴보았다. 말한 듯이 2, 3, 4절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나 상징 없이, 자연스럽게 서사가 흘러간다. 그럼에도 거시적인 의도를 소개하자면, 3절과 4절을 쓰면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나'가 지슬에 대해, 특히 지슬과의 이별에 대해 취하는 태도였다. 3절과 4절의 끝 부분, 지슬과 이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녀의 인생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선택은 주로 지슬을 '포기'하는 쪽이었다.

어떤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얻고 싶은 의지에 기반한다. 성현의 의지대로 일이 진행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무엇을 위해 포기했는가'의 그 무엇을 그가 지켜낼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문이다. 그리고 포기의 순간, 그 무엇을 정말로 지켜낼 수 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얼마나 확신할 수 있는가를 작품은 묻는다. 인간의 비극을 어떤 일을 강제로 겪는 무력의 상황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포기의 상황에서 찾은 것이다.


작품에 사용한 사소한 모티브들이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아 눈에 띄는 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 성현과 지슬의 첫 만남은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속 레제와 덴지의 첫 만남 장면을 모티브로 작성하였다. 비가 눈으로 바뀐 것과 분량과 대사량이 적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분위기(갑작스런 기상상황에 급하게 뛰어온 여자, 정신 없이 사과하는 여자 등)가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워낙 정석적이고 클리셰적인 장면이라 특별히 오마주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 같기도 하다.
  • 작품 속의 주요한 명시적인 모티브는 [노르웨이의 숲]이 유일하다. [노르웨이의 숲] 속 나가사와 선배는 아주 매력있는 여자인 하쓰미와 사귀고 있었으나, 외무성 시험에 합격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그 때문에 하쓰미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수 년 뒤 자살한다. 한국에서 지슬의 자살 소식을 듣고 '나'가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지슬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고,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지슬이 자살하게 되었다는 자책을 표현하는 인유(引喩)이다. 사실 작중 나가사와 선배는 하쓰미를 위하는 듯한 언행을 전혀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지 않았던 성현이 자신을 나가사와 선배에 빗대며 자책하는 모습은 '선택과 포기의 비극'을 강조하기도 한다. 지슬의 자살을 묘사하는 문단의 분위기 자체도 [노르웨이의 숲]이 하쓰미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