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 Book Review - 7-1. 태엽 감는 새 1부: 도둑까치 편 (PartⅠ: Ch.1~6)

시리즈 | Book Review - 7-1. 태엽 감는 새 1부: 도둑까치 편 (PartⅠ: Ch.1~6)

1986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잡지에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92년, 해당 단편을 첫 터로 해 [태엽 감는 새]의 1부인 [도둑 까치 편]을 월간 문예 잡지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2부인 [예언하는 새 편]을 거쳐 1995년 3부 [새 잡이 꾼 편]을 끝으로 완간하였다. 한국과학영재학교 도서관에는 1994년 문학사상사가 처음으로 퍼낸 번역본이 있었다. 해당 초판본에는 부재에 대한 의역을 꽤나 섞어 본래의 3부인 [새 잡이 꾼 편]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작가는 문학사상사가 2000년대 중후반 퍼낸 개정판을 읽었으며, 해당 개정판도 첫 판과 같이 총 4권으로 이루어져있다. 2018년 민음사는 제목을 원제와 더욱 가까운 [태엽 감는 새 연대기]로 바꾸고, 문학사상사가 낸 구판 3, 4권의 합본을 다시 써서 총 세 권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처음으로 끝을 정하지 않고 글을 쓴다. [태엽 감는 새]의 Book Review를 쓰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글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보다 먼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부터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글의 살이 될 속내용들도 마찬가지였다. 작가의 문학성은 아직 [태엽 감는 새]가 구축한 세계의 모티브들과 요소들의 배치와 그들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당 작품을 즐길 수 없었다거나, 해당 작품이 마냥 현학적인 비현실의 환상 같은 이야기 뿐이라는 말은 아니다. 책의 걷잡을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나름대로의 사유의 끈을 놓지 않으며 페이지를 넘겨갈 뿐, 이들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여 완성된 글로 써낼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태엽 감는 새]에 대해 글을 쓴다.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이 느꼈던 고유한 감상을 어딘가에 기록해 놓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딱히 리스크도 없을 행동이다. 한 번 마음 먹고 시작한 글은 어떻게든 좋게 끝나게 되어 있다. [마보로시]에 대한 글을 쓸 때에도 비슷한 걱정을 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하나의 완성된 글은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고, 작가는 확신한다.

최대한 진솔하게 글을 써내려 가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말하자면, [태엽 감는 새]는 문학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경험 중의 하나를 차지하였다. [상실의 시대]의 북리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 말고는 책에 대한 감상을 오해 없이 전달하기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해당 감상은 단순히 '좋았다'를 말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아니다. 말 그대로 '특별한 경험'은 [태엽 감는 새]의 독서 경험이 작가에 대해서 가지는 고유의 유일성을 요약하는 말이다. 모든 것을 이해시키지 않고도 독자들을 끌어당기고 묘한 여운을 남기는 방식이 현대 문학의 지향점 중 하나이고, [태엽 감는 새]는 그 영역에 작가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순간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될지도 모른다.


줄거리

80년대 중반, 서른 살의 오카다 도루는 집 뒤로 나있는 골목에서 아내 오카다 구미코의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다가, 고등학생 나이의 가사하라 메이를 만난다. 그가 일을 하지 않고, 그녀가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카다는 가사하라와 여러 이야기를 하고, 그녀의 가발 회사 아르바이트를 돕기도 하며 친해진다.
한편 구미코는 고양이 일과 관련해 가노 마루타라는 여자를 만났다며 그에게 소개해준다. 가노 마루타의 동업자이자 여동생인 가노 구레타까지, 하나같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들이었다. 이전에 몇년 동안 만났던 혼다 씨를 포함해서 구미코와 그녀의 가족들은 그런 오컬트적인 요소에 관심이 많았다.
혼다 씨의 지인이라는 마미야 중위는 그의 부고를 전하며, 혼다와 만났던 2차 대전 이야기를 해주었다. 눈앞에서 산 사람의 가죽이 벗겨졌던 이야기, 어두운 우물 바닥에서 몇 일 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마미야 중위가 전달한 혼다 씨의 유품 상자를 열었을 때, 오카다는 그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근처 나무숲에서 마치 태엽이라도 감는 듯한 '끼이이익'하는 규칙적인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그 새를 '태엽 감는 새'라고 불렀다. 구미코가 그런 이름을 붙은 것이다. 원래 이름은 모른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태엽 감는 새는 매일 그 근처 나무숲에 찾아와서 우리가 속해있는 조용한 세계의 태엽을 감았다.

앞서 말했듯 [태엽 감는 새]는 작가가 이전에 다룬 [상실의 시대]와 다르다. [드라이]와는 더욱이 다르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성에서의 차이점이 [태엽 감는 새] 독서 경험을 특별하고 황홀한 것으로 만들어낸다. 책은 기본적으로 현대에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가 갑작스레 이혼하게 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룬다. 그 이야기 속에는 구체화되지 않은 채 이 세상을 떠도는 근본적인 허무와 어둠이 차갑게 서려있다. 그러한 세상의 구성 요소들을 투영하는 소설의 메타포들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쓰여졌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는 흩어지는 연기처럼 불가해한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때문에 현대의 고독과 아픔이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베일에 감싸인 채 누군가가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이미 우리들 깊숙한 곳에 떼어낼 수 없는 상태로 내재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그들을 마주하게 되는 오카다 도루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동시에 모두가 어떤 형태로는 필연적으로 겪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그렇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비현실에 스며든 보편성을 이용해, 과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독자에게 안겨준다.

소설은 도입부부터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은근하게 말해준다. [도둑 까치 서곡]을 들으며 스파게티를 삶고 있는 오카다 도루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그 너머에서 자신이 현재 알몸이라는 여자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후에 그가 몇 년 전부터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골목으로 나가 가사하라 메이를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다음 챕터에서 밤 늦게까지 일하고 온 구미코는 그가 저녁 식사로 준비한 소고기 피망 볶음, 그리고 그가 사온 파란 티슈와 무늬가 있는 화장지를 보고 어덯게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만 골라 모을 수 있냐고 말한다. 오카다는 배가 고팠지만, 음식을 프라이팬에서 쏟아내 버리고 그녀를 위로한 다음 함께 피자를 먹으러 간다.

오카다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무력감'이라는 요소를 첫인상으로서 심어주는 도입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직한 상태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들려오는 전화기를 쥐고 파스타의 알 덴테를 걱정하는 상태. 그의 무력감은 구미코를 앞에 두고 상대할 때 더 강화된 채로 보여진다. 할만한 일을 찾아뒀으니 준비가 되면 언제든 시작하라는 그녀에게 그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고 답하고, 소고기 피망 볶음이 싫다는 그녀에 그는 배고픈 상태로 만들었던 요리를 버렸다. 오카다의 무력감은 곧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력감이다. 부담 주는 것이 아니라고 구미코가 말하고, 오카다도 그 말을 믿지만, 그의 무력감은 여전히 심연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때 오카다가 품고 있는 무력감이 소설의 도입부를 통해 여러가지 형태로 체화되어 나타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구미코와의 대화에서는 그녀만이 존댓말을 쓰고 있지만(1994년 초판과 2000년대 개정판의 번역에선 그렇다), 그 속에서 사회적인, 그리고 구미코와의 관계(가정)에서의 그의 위치가 꽤나 노골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화 속의 여자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찾아오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주체로서 가지는 인식에서의 무력감을 드러낸다. 독자가 그 사실을 알아챌 것을, 적어도 추상적이게나마 감지해낼 것을, 하루키는 알고 이 부분을 썼다.

소고기 피망 볶음, 파란 티슈와 무늬가 있는 화장지의 이미지는 나머지와 비교해 특별히 눈에 띌 정도로 선명하다. 정확히 말하면, 아주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소재이다. 우선 소고기의 갈색과 붉은색, 피망의 초록색, 티슈의 파란색이라는 색감의 배치가 어딘가 완결되고 안정적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부터 집고 넘어가자. 그리고 이들은 앞 부분 서사가 몸 담그고 있는 흐름 위에 놓이면서, '늦은 밤'이라는 묘하게 시간 독립적인 마무리에 해당하는 시점으로 이들을 수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소설에서 등장할 다른 대상들과 비교해보아도, 명확하게 결정되어있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지금의 상태였어야만 의미를 가지도록 그 개념들이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양파와 소고기를 함께 볶아도, 피망으로 무엇이든 만들어도 괜찮은데, 피망과 소고기를 함께 볶은 것만큼은 싫다고 구미코가 직접 말한다(티슈와 화장지의 경우도 비슷하다). 해당 명확함을 통해 소고기 피망 볶음과 파란 티슈, 무늬 있는 화장지라는 소재는 이전 챕터에 등장한 소재들과도 상호작용한다. 오카다는 중학생으로도 보인다는 서술로 가사하라 메이를 불명확함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전화 속 여자의 불명확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소고기 피망 볶음과 티슈와 화장지에 대한 구미코와 오카다의 대화를 읽고 나면, 이 두 이야기가 왜인지 훨씬 현실적이고 명확한 일로 보인다. 이성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이것이 [태엽 감는 새]가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인 방법 및 배치는 달라질 수 있어도, 하나의 사건 속에는 현실성과 비현실성이 어떤 비율로 배합된 채 존재하고 있다고 책은 보여준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소고기 피망 볶음, 파란 티슈와 무늬가 있는 화장지의 이야기를 이성을 조금 덜어낸 상태에서 살펴본다면, 직관적인 어긋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구미코는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텍스트 아래에서 묵직한 기체처럼 떠돈다. 대비될 정도로 선명한 현실성과 명확함이 오히려 그 반대의 성격을 가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오카다는 자신이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 계기로서 이 이야기를 말한다. 이는 무력감보단 단절이나 고립에 가까운 감정이며, 심지어 그 질문이 화두에 오르게 된 데에는 이가 일반론이라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전 챕터에서 그의 개인적인 무력감을 구체화하는 다른 요소들과는 표면적인 명확함 외에 또 다른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챕터의 끝에서 결국 이들의 근본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없음'의 감정이 배배 꼬인 채로 독자에게 건내어진다.

이러한 불안감은 해당 요소들의 현실성이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는 것으로서 전달된다는 점에도 일부 기인한다. 3인칭의 성격을 띠는 소설의 일반적인 묘사가 그 정도의 현실성을 가지는 것과 달리, 구미코나 오카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그러한 것은 수용론적 관점에서 더욱 확연한 의아함과 불안감을 유도한다. 해당 챕터가 대화로 이루어진 데에는 일차적인 생생함과 일상성의 확보 외에도 특별하고 모순적인 무력과 불안의 내재화라는 목적도 존재한다.

'무력감의 보편화'의 관점에서, 비현실적인 사건들은 상식적인 인과라는 기본적인 해석의 틀 없이 이들을 겪어내야 하는 오카다의 무력감을 드러내고, 그럼에도 존재하는 현실성은 해당 감정을 본격적으로 보편화한다. 이 과정에서 오카다 캐릭터가 구축되어가는 방식, 정확히는 구축되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의미를 해독하고 논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시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그러한 노력의 과정을 분명하게 드러낼 때도, 반대로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는 일대로 흘려보내는 태도를 보일 때도 있다. 어떤 일이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오카다의 모습은 소설의 좋은 환기가 되어준다. 그때마다 역시나 무력감이 드러나면서도 한 치의 과민반응 없는 인물 행동 묘사의 현실성이 눈에 띈다.

이후 오카다의 눈앞에 가노 마루타가 직접 등장하고, 오카다와 구미코의 대화에서 혼다 씨가 언급되어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등, 초현실적이고 오컬트적인 소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주도해나가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현실의 궤도에서 분명하게 벗어나기 시작하는 순간은 바로 오카다가 이전에 생일 선물로 받은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찾지 못하는 때이다. 약속을 잡은 가노 마루타는 그를 알아보기 위해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차고 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약속 장소에서 그를 바로 알아본다. 그녀가 쓴, 그리고 이후에도 쓸 빨간 비닐 모자는 해당 인물 자체의 비일반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설정임과 동시에, 독특한 옷차림임에도 오카다가 그녀를 알아보는 것보다 그를 더 빠르게 알아보는 모습을 통해 그녀의 특수한 능력을 암시하는 요소이다. 또 그녀의 이름인 마루타는 그녀가 이전에 물에 대해 연구한 지중해의 몰타(Molta) 섬의 이름을 따 직업 상의 가명으로 정해진 것임이 밝혀진다. 일본이 가지는 지중해의 섬에 대한 이미지가 정확히 어떨지는 몰라도, 아주 멀고 색다른 곳이라고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알게 모르게 가노 마루타라는 인물과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녀는 잃어버린 물방울무늬 넥타이가 집이 아닌 곳에서 발견된다는 말을 하고 떠난다.

오카다의 회상에서 등장한 혼다 씨는 가노 마루타와 같이 물과 흐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둘 모두 암시적이고 베일에 감싸인 정보를 에둘러 전달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주로 흐름과 흐름 속에서의 행동 강령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혼다 씨의 말이 비교적 구체적이다.

"흐름에 거스르지 말고 위로 올라가야 할 때는 위로 올라가고, 아래로 내려가야 할 때는 아래로 내려가는 거야. 위로 가야 할 때는 가장 높은 탑을 하나 찾아내어 그 꼭대기에 오르면 되지. 아래로 내려가야 할 때는 가장 깊은 우물을 찾아내어 그 바닥으로 내려가면 돼. 흐름이 없을 때는 가만히 있으면 되고. 흐름에 역행하면 모든 게 망가지는 법이지. 모든 것이 망가지면 이 세상은 어둠이야."

"단지 물을 조심하는 게 좋아. 이 사람은 앞으로 물과 관련된 일로 고생할지도 몰라. 있어야 할 장소에 없는 물.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물. 어쨌든 물은 상당히 조심하는 게 좋아."

- 혼다

물이라는 소재가 문학에서 자주 흐름이라는 관념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만 하다. 물에는 흐름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이를 일반화하면 그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어떠한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흐름이 있는 곳에는 자연스러움이 있고, 자연스러운 일에는 흐름이라 할 게 있다. 그러다 오카다를 중심으로 발생하게 될 여러가지 사건들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 있다. 그 때문에 그 곳에는 자연스러운 흐름도 없다. 흐름은 방향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야기의 흐름, 서사의 흐름 같은 말은 상식적이고 어느 정도 예측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이야기에 한해서만 붙여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결국 흐름이 없는 사건들의 연속을 하나하나 거쳐가는 상태는 이들을 이해하고 해석할 도구가 없는, 앞서 언급한 인식에서의 무력감이 느껴지는 상태이다. 곧 가노 마루타와 혼다 씨가 물과 흐름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함으로써 오카다가 가지는 인식에서의 무력감이 구체화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소설이 독자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사라짐의 연속'이라는 형태로 요약될 수 있다. '사라짐'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풀어 설명하자면, 그것은 인생에서 뜻밖에 맞이하게 되는 상실보단 더욱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소멸이나 빨아들임과 가까운 색을 띤다. 어떤 물체나 관념이나 감각이 빨려들어가 영원히 사라져버리게 되는 장소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엽 감는 새]는 우리 삶에 추상적으로 스며있는 상실의 기류가 바로 그러한 장소들에서 체화된다고 말한다.

챕터는 물방울무늬 넥타이의 사라짐을 통해 이야기를 세탁소 장면으로 연결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해당 세탁소 장면에는 아주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는 다리미의 스위치를 끄고 다리미를 다리미대 위에 세워놓고 나서, 테이프에 맞춰 [여름날의 사랑]을 휘파람으로 불면서 안쪽 방의 선반을 바스락거리며 찾고 있었다.
나는 그 영화를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와 둘이서 보았다. 트로이 도나휴와 샌드라 디가 나오는 영화다. 리바이벌 작품으로 코니 프랜시스의 [보이 헌트]와 동시 상영이었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 내 기억으로는 그건 그다지 신통치 못한 영화였다. 하지만 십삼 년 후에 세탁소에서 그 테마 음악을 듣고 있지나 그 시절의 좋았던 일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를 본 후에 우리는 공원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며 케이크를 먹었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과 [보이 헌트]가 리바이벌되어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여름방학 때였던 것 같다. 카페테리아 안에는 벌이 있었다. 작은 벌 두 마리가 그녀의 케이크에 앉았다. 나는 그 미세한 날갯짓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저기요, 파란 물방울무늬 넥타이라고 했던가요?"하고 세탁소 주인이 물었다. "이름은 오카다 씨였나요?"
"그래요."하고 나는 대답했다.
"댁은 운이 좋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오카다는 세탁소 주인이 넥타이를 찾는 동안 세탁소 라디오에 틀려있는 음악을 들으며 십삼 년 전 여자친구와 보았던 영화를 떠올린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건 그가 영화를 보고 난 이후 간 카페테리아와 여자친구의 케이크 위에 앉은 벌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선명한 시각적 정보와 함께 과거를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은 인물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며, 책의 작가가 이야기와 인물을 써 내려가는 방식이다. 세탁소에서 등장한 벌이라는 조화롭지 않은 대상은 꿈을 꿀 때처럼 불완전하게 구체화되지만, 동시에 놀라운 정도의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해당 이미지의 선명함은 극대화된다. 케이크에 앉은 노란색과 검은색의 벌 두 마리, 미세하게 떨리는 그것들의 날개는 과거의 것 같지가 않다.

책을 더 읽어나가야 느낄 수 있는 사실이지만, 오카다는 주로 현재에는 사라져 과거에 머무는 대상들을 회상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시간을 들여 과거의 것을 기억해낸다는 건 곧 현재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오카다의 그리움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존재하지 않게 된 것 중 적어도 여자친구에게로는 결코 향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호출해 나갈 뿐이었다. 카페테리아의 공간과 케이크, 그 위의 벌, 그리고 그 벌의 날개는 각자가 각자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벌의 날개에 대해서 오카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세탁소 주인에 의해 등장하지 않는다. 고등학생 커플이라는 관계와는 달리 물리적으로 존재하던 벌의 날개의 소멸이 오카다와 독자에게 과연 무엇을 남긴 것인지, 혹은 무엇을 앗아간 것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열 시가 되기 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단한 비는 아니다. 내리고 있는지 아닌지 잘 알 수 없을 정도의 적은 비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보면 틀림없이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 상황과 비가 내리고 있지 않다는 상황이 있으며, 그 두 개의 상황에는 어딘가 경계선이 그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 어딘가에 있는 경계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중략)
풀의 부드러움이 테니스화 얇은 고무 밑창에서 느껴졌다. 골목은 여느 때보다 조용했다. 잠시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화벨 소리도 이젠 그쳤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거리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단색인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런 날에는 아마도 구름이 지표에서 나는 여러 가지 소리를 흡수해버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냐, 그것들이 흡수해버리는 게 소리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좀 더 다른 여라 가지의 것들이 함께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감각 같은 것까지도.
(중략) 가는 도중에 있는 어느 집 라디오가 켜져 있었다. 그것이 내가 들은 유일한 소리다운 소리였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인생 상담을 해주는 것이었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장모에 관한 고민을 늘어놓고 있었다. 단편적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는데, 장모는 예순여덟 살로 경마에 빠져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집을 지나쳐버리자 점점 그 라디오 소리도 작아져 마침내 사라져버렸다. 라디오 소리뿐 아니라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중년 남자와 경마광인 장모가 조금씩 희미하게 사라져버린 듯했다.

비 오는 집 뒤 골목을 우산 없이 거닐며, 오카다는 '사라짐'에 대해 더욱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눈에 힘을 풀면 사라지는 빗줄기, 회색 빛에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소리와 감각, 거리가 멀어지며 희미해지는 중년 남자와 장모가 연속으로 등장한다. 이때 소설은 사라지는 대상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사라지는 곳, 혹은 이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주체에도 주목한다. 시간, 공간, 하늘의 회색에 이들이 짓이기 듯 사라지지만, 그것들은 그저 그곳에 담담히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도착한 빈집에서 오카다는 다시 가사하라 메이를 만나고, 처음으로 태엽 감는 새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리고 같은 빈집에서 가사하라의 소개로 말라 있는 깊은 우물을 본다. '꽤 깊은 우물인 듯, 중간쯤부터는 어둠 속으로 흡입되어 있었다' 고 오카다는 말한다. 빛이 사라지고 마땅한 시야가 사라지는 어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우물도 그곳에 있었다.

'오카다 구미코는 어떻게 태어나고, 와타야 노보루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쳅터는 오카다가 구미코로부터 이야기, 와타야 노보루를 만났던 일 등을 회상하며 전개되며,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꼼짝 없이 겪는 것을 묘사하는 이전 쳅터들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해당 쳅터는 구미코의 유년 시절을 포함한 과거를 다루면서 이전까지 현실 위에 붕 떠있던 구미코라는 인물을 다시 현실의 궤도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 서술자로서 독자에게 이미 익숙해져 잇는 오카다 도루의 영역으로 구미코를 효과적으로 포섭했다고도 할 수도 있다. 오카다가 그 이야기를 그녀와 알게 된지 두 달 후 일요일 아침, 한 침대 속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며 그녀의 첫 경험 상대가 자신이었음을 밝힐 때 해당 포섭이 가장 잘 느껴진다. 구미코를 하나의 주변 인물에서부터 시작해 오카다의 아내의 자리까지 본격적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그렇게 확보해 놓은 현실성 위에 소설은 구미코라는 인물을 통해 언니의 죽음과 가족들의 무관심이라는 상실을 얹는다. 구미코의 구체화와 동시에 해당 인물에 소멸과는 구분되는, 소설 속의 새로운 '사라짐'의 정서를 추가하는 것은 서사적으로 꽤나 과감한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구미코로부터 차분하게 말해지는 밀도 있지만 재빠르고 절제된 과거의 이야기에서는 그 미묘한 단순함이 가장 큰 잔인함으로 작용한다. 그러한 효과는 두 번째 장 전반을 지배한 바 있는 구미코 특유의 말투에서도 일부 기인한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애정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심지에는 손 시리게 차가운 무엇인가가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음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독자는 이 쳅터를 읽으며 자연스레 그것이 그녀의 과거로부터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불가항력이자 외부 세계 속 자신의 위치에 대한 무력감이다. 결국 해당 쳅터의 전반부는 말투를 포함한 여러 부분에서 구미코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지 상상하고 질문하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 과거의 상실에 숨어있다는 소설의 은근한 답변은 주제와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렇게 과거로부터, 어찌 되었든 결국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인간 구미코에 접근해간 독자에게 여전히 그녀가 불가해의 영역에 남겨져 있다고 느껴진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갔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전보다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은 잔여는 구미코로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오카다에게도 남았을 것이다. 오카다가 구미코에게 건내는 말이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며 하는 말인지, 혹은 그저 일반론일 뿐인지, 일반론이라면 도움이 되는 일반론인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질문이 무의식 속에서 대화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만약 언니가 살아있었더라면 당신도 분명 우리 언니를 좋아하게 되었을 거예요. 누구라도 한눈에 좋아하게 되었죠."하고 구미코는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난 네가 좋아. 이봐, 이건 아주 단순한 일이야. 이건 나와 너 사이의 일이지, 네 언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야."
그러고 나서 한동안 구미코는 입을 다문 채 곰곰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일곱 시 반에는 모든 소리가 부드럽고 공허하게 울린다. 나는 아파트 지붕 위에 잇는 비둘기의 발소리를 들었고, 누군가가 멀리서 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구미코는 정말 오랫동안 천장의 한 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고양이 좋아해요?"
"고양이는 좋아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아주 좋아해. 어렸을 적에는 쭉 고양이를 길렀지. 즐 고양이와 함께 놀았는 걸. 잘 때도 함께였고."
"그런 건 멋지겠죠? 나도 어렸을 때부터 무척 고양이를 기르고 싶었어요. 하지만 기를 수 없었어요. 어머니가 고양이를 싫어했거든요.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정말로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가져본 적인 단 한 번도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그런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게 어떤 인생인지 당신은 틀림없이 모를 거예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는 인생에 익숙해지면 그러는 사이에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조차 점점 알 수 없게 되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분명히 지금가지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자신의 인생을 다시 선택할 권리가 있는 거야.. 고양이를 기르고 싶으면 고양이를 기를 수 있는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면 돼. 간단한 일이야. 네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 안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구미코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렇네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뒤에 나와 구미코는 결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어서 소개되는 와타야 노보루는 그 자체로 어떠한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인 어긋남과 간극을 대변하는 상징물처럼 작동한다. 와타야 노보루의 유년 시절은 그의 내면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현실은 그가 정치 평론을 쓰고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활약하는 모습만이 보여졌을 뿐이다. 오카다는 언제 어디서나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를 지켜보며 확신에 가까운 이상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로서 와타야 노보루는 내적인 공허의 내재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인물이 된다. 그의 명성과 유창함, 지식 등의 화려한 외적 요소들에 내부의 공허가 묻어나오는 과정은 그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와타야 노보루의 숨겨진 내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교차하며 이 세상의 기이함과 모호함의 정도가 한 층 더 짙어진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