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 Book Review - 8. 헛간을 태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적인 단편 작품이다. [상실의 시대](반딧불이), [태엽 감는 새](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등 하루키의 대표 장편 소설은 그의 단편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헛간을 태우다](1983)은 특이하게도 2018년, 전직 소설가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 이창동의 손을 거쳐 [버닝]으로 영화화되었다.
작품의 초반 분위기는 하루키의 여타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과 흔히 '그녀'로 지칭되는 한 여자와 그녀의 지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광고 모델 일을 했지만 게을러서 수입이 보잘 것 없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남자친구를 틍해 생계를 지탱했다. 그녀에겐 어떠한 단순함이 있고, 남자친구들은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그 단순함에 적용시켜보고 싶은 마음을 품었을 것이라고 '나'는 설명한다. 그렇게 그녀는 소설 속에서 여러가지 의미로 단순함을 상징한다. 그녀가 인간적으로 복잡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일절 등장하지 않고, 그녀가 있을 때 그 장소는 그 한계까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단순해진다.
그녀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녀의 말에는 특별한 의미다운 의미는 없었다.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도 그 내용을 거의 듣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단순함은 독자에게도 편안함이 되어준다. 보스턴 백 하나만 가지고 알제리로 3개월간 떠날 때, 나이가 많은 '나'에게 밥을 얻어먹을 때, 졸음이 쏟아진다면 어떤 장소든지 잠에 들 때 작품 전체의 긴장이 완화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녀가 퇴장하는 순간 작품은 새로운 국면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다.
알제리에서 만난 그녀의 새 남자친구가 해당 단편의 사실상의 주인공이다. 그는 정중한 말투를 사용하며 돈이 많고, 무역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해당 인물은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익명의 성격을 가진다. 다른 작품에서처럼 [헛간을 태우다]에서도 하루키는 익명이라는 기반 위에 한 인물의 비현실적인 개성을 얹어 놓는다. 그때 발생하는 특정한 간극이나 부조화감이 작품의 분위기 형성과 이후 서사 전개의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음식을 잔뜩 싸 들고 '나'의 집에 찾아와, 맥주와 함께 먹은 다음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졸리다면서 윗층 다락방으로 가 잠들어버린다. 이때 '나'는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한 연극 중 아픈 어머니를 둔 여우에게 금액이 부족하다며 장갑을 팔지 않는 장갑 장수를 연기했던 일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학예회 연극이라는 상황과 직접 인용되는 몇 줄의 대사가 회상의 소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분위기를 비롯해 해당 회상은 갑작스러운 것으로 느껴지지만, 그러한 감각들이 '단순함'이라는 개념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관점에서 꽤나 자연스러운 연계임을 알 수 있다. 초등학교 학예회의 연극에선 어떤 인물이 악역이고 선역인지, 한 대사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단순하게 정해진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회상을 끊고 말을 시작할 때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된다.
때때로 헛간을 태우는 겁니다.
하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헛간들 중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헛간을 골라내, 그곳에 가솔린을 뿌리고 불 붙은 성냥을 던진다. 헛간이 타오르는 데에는 15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헛간들이 자신에게 태워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고도 말한다.
소설에서 왜 무엇인가가 태워져야 하고, 왜 그 대상이 헛간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고민 이전에 독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다. 바로 낡은 헛간과 그 위로 치솟는 불길의 선명한 이미지이다. 붉은 화염이 헛간을 감싸며 상승하고 검게 탄 잔해가 무너져 내린다는 점에서 타오르는 헛간의 이미지는 동적이지만, 동시에 묘하게 정적인 부분도 있다. 그러한 이중적이고 모호하지만, 동시에 절대적으로 선명한 이미지는 이후 작품 전체를 지탱하고 지휘한다.
'단순함'이라는 잣대를 들이밀더라도 타오르는 헛간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헛간과 불길은 '낡고 15분만에 타버리는 것', '헛간을 15분만에 태워 없에는 것'으로 그 자체로는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이것은 '수많은 헛간들이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언급과 연관을 가진다. 타오르는 모든 헛간은 수십 년을 존재해 왔지만 15분 만에 그 존재가 사라지고, 불길은 한 순간에 생겨나 15분만 존속하다가 헛간과 함께 사라진다. 단순한 존재들은 이 세상 속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실질적으로 행하는 그 남자라는 인물과 해당 행위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주듯이 서술하는 그 어투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 어떠한 의도란 걸 가지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그저 있는 데로 솔직하게 토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의미를 암시하려 하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해할 수도, 의미를 상상할 수도 없는 대상을 단순하다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로서 해당 인물과 헛간에 대한 대화 장면은 소설 속 가득 차 있는 나머지 단순한 개념들과 명확한 대비를 일으킨다.
이후 '나'는 그로부터 집 근처에서 태울 헛간을 정해 놓은 상태라는 말을 듣고 그가 태울만한 헛간을 5개로 추려, 매일 아침 러닝과 함께 5개의 헛간을 차례대로 확인한다. 그러한 기묘한 루틴은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때때로 나는 그가 나로 하여금 헛간을 태우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요컨대, 헛간을 태운다고 하는 이미지를 내 머리 속에 심어 놓고 나서,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주입시키듯이 그것을 점점 더 부풀려 나가는 것이다.
확실히 나는 가끔 그가 태우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성냥을 그어 태워 버리는 쪽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낡은 헛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위 구절은 단순함에서 벗어난 이미지 하나만으로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한 달 동안 아무런 헛간이 타지 않아도 '나'는 계속해서 뛰고, 어딘가에서 타오르는 헛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곧 타오르길 기다리던 헛간 하나를 태울 것이라고 말하는 이미지가 '나'의 마음 속에 남은 것이다.
그녀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한 달이 지난 12월 중순, '나'는 다방 주차장에서 그의 차를 발견하고 들어간다. 그는 헛간을 하나 태워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헤어진다. 그는 그녀가 '나'를 신뢰할 수 있고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행방을 찾으려 노력해보아도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그와의 대화 이후 '나'에게 주어진 단순함은 전부 사라져버렸다. 단순함을 품은 그녀는 사라졌고, 그가 하는 말의 의미는 더욱 깊은 알 수 없음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를 찾기 위한 '나'의 노력은 그 단순함이 '나'에게도 특별한 것이었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실제로 헛간을 태우는 것이 맞는지도 알 수 없어졌다. 그런 공허한 상태로 1년이 흐른다.
나는 아직도 매일 아침, 다섯 개의 헛간 앞을 달리고 있다. 우리 집 주위에 있는 헛간은 아직 하나도 불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헛간이 불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또 12월이 찾아와서 겨울새가 머리 위로 날아간다. 그리고 나는 계속 나이를 먹어 간다.
밤의 어둠 속에서 나는 때때로 불타서 쓰러져 가는 헛간을 생각한다.
위 문단으로 소설은 끝난다. 1년이 흐른 뒤 '나'에게는 무엇이 남았는가, 하는 질문이 깊게 울린다. '나'를 위한 대부분의 것들은 이제 사라져서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행동의 목적, 사건과 말의 의도, 그것들을 해석해 낼 단서 같은 것들을 잃어버린 채로, '나'는 매일 아침 낡은 헛간 앞을 달린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시간은 흐르고, 12월의 겨울은 되돌아오고, '나'는 나이를 먹는다. 그 어떤 상실에서 이 세상은 멈추지 않고 기존의 루틴을 반복할 것으로 보인다. 머리 위를 활공하는 겨울새나 헛간을 불태우는 그녀의 남자친구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되는 외부 세계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나'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하루키가 소설 속에 그려 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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